다석을 소개하자니 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제자 박영호가 지은 평전인 <다석 유영모>를 보고서 이 글을 엮어 가지만 박 선생도 스승의 사상과 가르침에 치중하거나 반복하는 경향이 많다. 다석 연보(年譜)를 봐도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그 까닭은 단 하나, 바깥세상과의 접촉이 지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나서 성년이 될 때까지의 행적이 묘연한 예수나, 생몰조차 불명확한 노자(老子)와 같은 오랜 옛적의 성현들과 비교하긴 어렵겠지만, 다석이 남긴 큰 생각에 비추어보면 미미하기 그지없다. 다만 우리는 <사복음서>의 예수의 말씀과 <도덕경>의 말씀처럼 그이가 남긴 말씀에서 다석을 뵈면 될 뿐이라고 생각된다.

다석은 1921년 그의 나이 31살 때 정주 오산학교 교장으로 일한 뒤 50대까지 약 20~30년간 동안, 그리고 그 이후의 생에서도 파란만장하다거나 드라마틱한 사건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다석 중·장·노년의 인생궤적에서 드러난 한두 가지만 살펴볼까 한다. 주로 그가 세상을 향해 말씀, 혹은 설교를 하게끔 자리를 만들어준 시대의 선각자들과의 만남이다.

먼저 '영성의 강의'라 일컬어지는 서울YMCA 연경반과의 만남이다. 1927년 서울YMCA 총무인 현동완은 월남 이상재 선생이 돌아가시자 월남이 지도하던 연경반 강사로 유영모를 초빙한다. 박영호의 글을 옮겨본다.

"만약 현동완이 없었다면 유영모가 깨달은 진리가 시공 속에 묻혀버려 아는 이가 아주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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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 YMCA가 주최한 회갑기념 강연회를 마치고 찍은 사진. 맨 앞줄 가운데 앉은 이가 다석, 그리고 왼쪽에서 네 번째가 함석헌이다.

현동완은 농림부장관, 보건복지부장관도 마다하고 봉사직인 YMCA 총무 자리를 죽을 때까지 지킨 참사람이었다. 국산품 애용 정신으로 커피를 마시지 않았고, 세계평화를 위해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고아를 위해 하루 한 끼만 먹었다. 또한 현동완은 두 벌 옷이 없었고, 머리 둘 집 또한 없어 난지도 보육원 시설인 소년촌 단칸방을 병실로 쓰다가 그곳에서 숨졌다. 현동완은 진실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다.

유영모는 YMCA 모임에 대해 '내가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얘기를 해야 한다 하는 것은 내 생각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성령이 내 정신을 보고 꼭 나가라고 해서 나오게 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살아서 이렇게 모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무슨 학교 공부를 해야 하고 무슨 지위를 바라는 것은 한낱 꿈이 아니겠습니까?'

유영모는 평소 말이 적었으나, 일단 강의에 들어가면 영감에서 오는 독창적인 말씀이 끊어질 줄 몰랐다. YMCA 모임은 오후 두 시에 시작해 보통 다섯 시를 넘겼다. 한 번은 여섯 시간 동안 강의가 이어진 적도 있었다. 연경반 모임은 일제의 간섭으로 순탄치 못하다가 1938년 강제 폐쇄되고 말았다. 그래도 유영모와 현동완은 숨어서 작은 인원으로 연경반 모임을 계속했다.

해방 후에도 계속된 연경반 강의는 현동완이 세상을 떠나자 중단됐다. 1964년 후임 총무로 취임한 전택부는 YMCA 건물을 새로 짓고도 연경반 모임은 다시 열지 않았다. 이는 교회 장로인 전택부가 현동완처럼 유영모의 차원 높은 영성신앙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28년에 시작된 유영모의 연경반 강의는 1963년까지 35년 동안 이어졌다."

다석의 말씀은 그가 쓴 일기인 <다석일지>외에 YMCA 연경반 강의 가운데 일부인 강의 속기록이 전부라서 박영호는 현동완선생이 만약 다석을 연경반 강사로 불러내지 않았다면 다석의 깊은 깨달음이 자칫 묻혀버렸을 수도 있었다고 했던 것이다.

다석을 알아본 또 한 사람은 김교신이다. 김교신은 동경 유학 시절, 일본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일본기독교의 자주성을 주장한 우치무라(內村鑑三)와 그의 무교회운동(無敎會運動)에 큰 감화를 받았다. 이로 인해 그는 같은 유학생이었던 송두용(宋斗用)·유석동(柳錫東)·양인성(楊仁性)·함석헌(咸錫憲) 등과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여 우리말 성경을 읽고 연구하였다. 또 이들은 졸업하고 귀국하여, 1927년 7월 월간 동인지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창간하였고, 김교신은 동인지의 주필을 맡았다. <성서조선>은 1942년 3월호의 권두언 '조와(弔蛙)'가 한국민족의 혼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불온잡지로 지목되어 폐간 당하였다.

이때 그를 비롯하여 함석헌·송두용·유달영(柳達永) 등 13명은 검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는데 이것이 '성서조선사건'이다. 김교신은 1944년 7월 함남질소비료공장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 노무자들의 처참한 생활을 도와주기 위해 이 공장에 입사하여 주로 교육·후생·주택 등의 문제를 보살펴주다가, 1945년 4월에 죽었다.

다석은 성서조선 연구회 모임에 김교신의 초대로 참석은 하였으나 좀처럼 말하지 않았다. 그의 영성신앙이 정통기독교의 대속신앙과 교의신앙에 배치되었기 때문이었다. 1937년 1월 모임에서 다석의 요한복음 3장 16절의 풀이가 있었을 때 좌중은 충격에 휩싸여 분위기가 분분해지자(이 부분은 강독 시리즈 한편에서 다룸) 김교신은 사람들에게 다석 선생의 성경 풀이는 아주 높은 차원에서 하는 말씀이므로 그 말씀을 알아들을 만한 귀를 따로 갖고 듣지 않으면 그 참뜻을 바로 이 자리에서 깨닫기 어려우니 각자 마음에 간직하고 돌아가서 오랫동안 새겨보라고 타일렀다고 한다.

다석은 그의 나이 마흔여섯 살 나던 1935년 평생 그리던 귀농생활을 위해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로 이사한다.

"꿈틀거리고 사는 이 세상에서는 지각 있는 사람은 서울 같은 도시에 살지를 않습니다. 농민, 노동자, 이들은 모두 우리를 대신해서 짐을 지는 예수들입니다. 대중의 고통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다석의 이 말씀을 박영호는 유영모의 대속신앙이라고 언급했다.

다석은 대문에 '참을 찾고자 하는 이는 문을 두드리시오'라고 써 붙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서울 성 밖에 사는 비천하고 가련한 사람이라 하여 가련자비(可憐自卑)라는 한시를 지었다.

自下門博人(자하문박인) 하문에서 나온 평범한 사람

紫霞門外生(자하문외생) 자하문 밖에 사네

陽止所居處(양지소거처) 볕 머문 곳에 살면서

陰直以己行(음직이기행) 그늘을 바루어서 살아가리라

다석의 일대기에 대한 소개는 간략하나마 이로써 마친다. 글쓴이는 이 시리즈의 머리에서 다석의 소개와 말씀은 그의 제자들과 다석학회에서 나온 많은 책이 있다고 미리 말씀드렸다. 다음 편에는 다른 주제를 가지고 글을 이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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