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회사 사장이 민주화운동 지원하는 까닭

6월 초쯤이었나. 경남도민일보 광고마케팅팀 신현열 팀장이 "민 기자, 동원건설 장기영 대표가 경남지역 6월 항쟁 기념사업에 물심양면으로 큰 도움을 주고 있는데, 한 번 인터뷰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제안했다. 건설사 대표와 한국 현대사를 바꾼 '거대한 물결'인 6월 항쟁이라…. 잘 매치(서로 조화를 이루어 잘 어울림)되진 않았지만, 만나서 이야기 나누어 보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지난 6월 15일 오전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동원건설산업(주)에서 장기영(52) 대표이사를 만났다. 장 대표이사 나이와 대학생 시절 이야기 등등 '스토리'를 들어보니 왜 그가 6월 항쟁 기념사업에 왜 아낌없는 지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궁금증이 상당 부분 풀렸다.

가난에도 형제들 모두 대학 진학

Q.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장기영이 말하는 장기영이란?

"창원대 86학번(행정학과)인데, 대학 졸업하고 뜻하지 않게 들어간 회사가 건설회사입니다. 올해 23년째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고향은 의령 지정면인데, 초등학교 4학년 때 마산 회원초등학교로 전학을 왔어요. 그러고 보니 마산·창원에서 산 게 이제 40년이 넘네요. 지금도 부모님은 계속 의령에 계시고, 제사 지낼 때마다 의령으로 갑니다(웃음). 집이 너무 가난해서, 좀 부자가 되는 게 소원이었어요. 특별한 부자가 아닌 먹을 거, 입을 거, 집 걱정 없는 부자. 제가 과일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아침 식탁에 과일이 놓여 있고 먹을 수 있는 정도만이라도 살림을 꾸렸으면 했죠. 제 밑으로 동생이 4명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게 없었어요. 산골에 밭 하나 말고는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어요. 6·25 전쟁 통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우리 아버지가 장남이었고, 열두 살밖에 안 되었어요. 위로 누나 한 명에 동생 두 명이 있었죠. 그러다 보니 남의 집에서 일하고, 학교도 못 다니셨어요. 하지만, 아버지 당신은 물려받은 재산도 없고, 가난하게 살았지만, 교육에 대한 열정이 있었어요. 특히 어머니가 교육열이 대단하셨어요. '구걸을 해서 먹고살더라도 무조건 아이들 교육은 시켜야 한다' 이런 신념을 지니신 분이었습니다. 근처에 사는 이웃집은 우리보다 사정이 나았는데도, 자녀들을 고등학교에는 안 보냈어요. '공부시키면 뭐할 건데' 이런 생각이 강했던 것 같아요. 대부분 공장으로 보냈어요. 반면 우리 부모님은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너거가 공부 안 할 거면 모르겠지만, 할 거면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 5남매가 전부 전문대 이상 나올 수 있었어요. 당시 '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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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영 동원건설 대표. / 김구연 기자

Q. 구체적으로 돈을 좀 벌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 했는지.

"아버지는 농사지으시니 더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제가 고등학교(마산 경상고) 3학년 무렵에 '뭘 해서 동생 4명 건사하고, 집안을 제대로 세울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우리 집안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일단 몸으로 '때워서' 하는 일 중에 제일 괜찮은 게 뭘까 생각했습니다. 대한항공 조종사가 되는 게 최고겠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엔 공군사관학교를 지원했어요. 당시엔 이게 조종사가 되는 코스였거든요. 그런데 뜻하는 대로 안 되더라고요. 떨어졌죠. 그 와중에 아버지께서 '동생이 이렇게 많은데, 더는 기영이는 공부를 시킬 수 없으니, 첫 번째 대학 입학금은 넣어줄 테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대학에 다니든지 말든지 해라'고 하셨어요. 조금 서운했지만, 그게 현실이니 받아들였죠. 당시에는 '선 시험 후 지원'이었거든요. 그래서 내 점수에 4년 동안 장학금 받을 수 있는 대학교와 학과를 찾았어요. 창원대 행정학과가 가능하겠더라고요. 당시 '재종 형님'이 도청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공무원이 되는 게 괜찮다며 행정학과를 추천했어요. 저도 행정고시를 쳐서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이었죠. 하지만, 아쉽게도 전액 장학금은 받지 못하고 절반만 받았어요."

학생운동과 함께한 학창 시절

Q. 자연스럽게 대학생 시절 이야기로 넘어가 보죠.

"당시 졸업정원제라는 게 있었어요. 간단하게 설명하면 44명 뽑아서 40명만 졸업시키는 거죠. 전두환 정권이 학생들에게 공부만 하게 해서 다른 곳에 눈(관심)을 못 돌리게 하려는 거였죠. 아무튼,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가면 학생운동을 하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국민윤리> 시간에 '공산주의 이론'이 나왔는데, 이게 무슨 사상이고 도대체 어떤 논리이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반대하고 열광하는지 궁금했고, 정말 한번 공부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소위 말하는 '이념 서클'을 스스로 찾아갔지요. 1학년 2학기 때부터 본격적으로 '삼삼오오' 모여서 책 읽고 토론했죠. 대학 들어가기 전 당시 겨울 방학 때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을 만났어요. <해방전후사의 인식>입니다. 시험쳐놓고 의령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우리 외가 쪽으로 서울대 다니는 형님이 있었어요. 이 형이 그때 의령에서 '방위'를 하고 있었어요. 맨날 할 일이 뭐 있겠습니까. 저녁때마다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술도 마시고 했죠.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이 형이 책을 한 권 내밀더군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인데, 재미있을 거다'라고 했어요. 읽는 순간, 짐작은 했습니다만, 아, 정말 우리 역사가 이렇게 왜곡되어 있었나 싶었어요. 소름이 돋았죠. 그 책을 읽으면서 역사의식이란 게 정말 중요하구나, 생각했어요."

Q. 첫 시위는 언제 나갔는지.

"제가 이른바 '가두 투쟁'을 처음 나간 게 1986년 10월 26일, 마산 창동이었어요. 당시 누가 시위에 나오는지도 모르는데 선배들이 몇 시에 '고려당' 앞으로 모이라고 했어요. 박유호 선배가 메가폰을 매고 선동을 했는데, 금방 전투경찰, 백골단이 나타나서 우리는 도망갔고 박 선배는 잡혔지요. 그게 첫 시위 참여였습니다. 그 당시 시민들은 학생들에게 그다지 호응하지 않았어요. 반응이 싸늘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후 1987년 6월 어느 날이었는데, 당시 시위대와 경찰이 마산 분수로터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어요. 시위대는 마산 어시장 쪽을 등지고 있었죠. 그런데 해가 바뀌니까 시민들이 우리를 많이 지지했어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전두환의 4·13 호헌 선언 등으로 전두환 정권에 등을 돌렸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아무튼, 그야말로 대중적인 투쟁이 벌어졌죠. 그날 이후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6·29선언을 하기 전까지 창동을 중심으로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시위가 있어요. 마산 창동은 1960년 3·15의거, 1979년 10·18 부마민주항쟁, 1987년 6월에도 중심이었죠. 그때라 해봐야 창원에는 경남도청과 창원대가 제일 큰 건물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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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영 동원건설 대표. / 김구연 기자

공안바람에 구속까지

Q. 이후 대학생 시절 이야기도 궁금해지네요.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는 교지편집위원이 되고, 88년 3학년 때 편집위원장을 맡았어요. 88년에 총선이 있었습니다. 당시 창원 유세장에 가서 완전한 민주주의, 노태우가 대통령이 된 상황에서 '여소야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내용으로 시위를 했는데, 금세 백골단이 덮쳤죠. 그때 저를 포함해서 3명이 구속됐는데, 제 인생 첫 구속이었죠. 집행유예로 풀려놨어요. 이후 다시 교지 일 마무리하는데, 얼마 안 있어서 총학생회 선거가 있었어요. 함께 독서서클 했던 동기들은 다 군대 가고, 3학년은 저밖에 없었어요. 학교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보니 군대 다녀온 선배들은 그리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남아 있던 선배들이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저를 총학생회장 후보로, 재료공학과 87학번 허동출을 부총학생회장으로 나가라고 했어요. 이론은 제가 담당하고, 비주얼은 이 친구가 도맡았죠(웃음). 당시 학교 근처 다방을 하나 통째로 빌려서 종일 학우들 만나고 정견 이야기하면서 선거운동 했었죠. 모두 3팀이 나왔는데, 우리 팀이 압도적 지지로 당선됐어요. 53% 정도 얻었어요. 89년 임기를 시작했는데, 5월 대동제 때 평양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세계청년 청년학생축전을 소개하는 팸플릿을 만들었어요. 이후에 임수경이 평양 세계청년 학생축전 참가 사건과 서경원 의원 방북 사건 등이 있었죠. '공안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89년에만 마창지역에서 50명 넘는 노동자와 대학생이 구속됐어요. 아무튼, 이때 저는 이미 4월부터 경찰이 집시법 위반, 폭력, 방화·미수 등등을 다 걸어놓은 상태였는데, 이 팸플릿도 국가보안법 위반(이적표현물 제작배포) 혐의를 적용했습니다. 그러다가 7월 고성으로 농활 갔다가 잡혔어요. 임기를 반도 못 채우고 잡혔는데, 바로 구속됐죠. 처음엔 검찰이 5년 구형을 때리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재판정에서 신고 있던 고무신을 던지고 거세게 항의했죠. 1심에서 선고가 3년이 나왔어요. 근데 검사가 다시 항소를 했어요. 반성하는 기미가 전혀 없고, 출소하면 검사를 보복한다고 하므로 3년이 아닌 자기 구형한 대로 5년을 줘야 한다면서요. 저도 당연히 항소했고요. 부산고법 2심에서 2년형으로 1년 형이 줄긴 했는데, 앞에 88년 때 집행유예가 8, 9개월 남아 있었거든요. 그래서 옹근 3년 가까이 교도소에 있어야 했죠. 만기 출소를 91년 12월 27일 했습니다. 교도소에 있으면서 신문 정독하는 습관을 들이고, 책도 많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당시 악질 판사, 악질 검사 이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들 살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Q. 6월 항쟁 기념하는 사업에 도움을 주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큰 도움은 아니고요. 아는 분들이 '좀 내놔라!'라고 난리를 쳐서(웃음). 선배 몇 분도 도와줘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도 이 한마디는 했습니다. '하이고, 인자 좀 아군 거는 고만 빼앗아가라'라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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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영 동원건설 대표. / 김구연 기자

Q. 쉬어갈 겸 가벼운 질문 몇 가지 해보죠. 무슨 음식을 좋아하세요.

"별로 가리는 건 없어요. '엄마 표' 집 밥이 제일 좋은데, 낙지 종류 요리를 좋아합니다. 그냥 맛있더라고요."

Q. 주량은 얼마나 되나요.

"소주 2병 정도. 이전에는 정말 많이 마셨는데, 지금은 자제하는 편입니다. 주로 '비즈니스' 때문에 마십니다.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싶은 게 술입니다."

Q. 동원건설 소개 좀 부탁합니다.

"토목·건축을 주로 하는 종합건설사입니다. 2000년 시작했으니, 17년째가 되네요. 직원은 30여 명이고, 지난해 매출은 400억, 올해 매출은 600억 원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Q. 요즘 건설 경기는 어떤가요? 문재인 정부에 건설 관련 제안하실 게 있다면.

"이전에는 SOC(사회간접자본) 쪽으로 일이 많았어요. 예를 들면 경지정리 사업 같은 게 엄청나게 많았죠. 그런데 지금은 없어요. 거의 10분의 1 수준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4대 강 사업을 했지만, 그건 규모가 되는 극소수 몇 개 건설 업체만 참여했지, 연매출 100억에서 500억 이하 회사는 많이 참여할 수 없었어요. 문재인 정부에서 '도시재생사업'으로 1년에 10조 원씩, 임기 안에 몇십 조 투입하겠다고 했습니다. 필요한 사업입니다. 하지만, 이 사업마저도 대기업 위주로 가면 우리 같은 지역 건설 업체들에겐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겁니다. 지금은 지역에서 관급 공사 때 100억 원 이상만 공동도급할 수 있게 돼 있는데, 대형건설사들이 하도급 업체 쓸 때 지역 업체로 할 수 있도록 자치단체에서 노력을 해줘야 합니다. 실제로 이런 하도급업체에 돈이 들어가야 지역경제가 살 거든요. 이게 안 되면 지역에서 아무리 건설 경기가 일어나더라도 돈은 다 서울로 빠져나가게 됩니다. 낙수 효과 자체를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국가가 레저나 펜션, 편의 시설를 건설하는 쪽으로도 많이 투자했으면 합니다. 현재 '여가 사업'이 크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요즘 연휴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밖으로 나가서 지냅니까."

동문 기업 탐방 등, 총동창회 활성화 노력할 것

Q. 18대에 이어 19대 창원대 총동창회장도 맡고 계시는데요. 앞으로 총동창회를 어떻게 이끌어나가실 예정인지요.

"제 이전의 선배들이 잘 꾸려왔지만, 우리 총동창회가 그다지 지역사회나 동문 사이에서 각광받는 단체는 아직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해봤을 때 그 이유는 동창회 발전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데, 그것보다는 동창회 명함으로 자기가 오히려 빛나려고 하니까 상대적으로 동창회는 죽는 겁니다. 총동창회는 현재 세대교체 중입니다. 이전에는 회장들이 분담금을 내는 거 외에는 기타 기부금이나 발전기금 등을 잘 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직이 재정적으로 힘들었고, 이러다 보니 사업을 줄이는 악순환이 이어졌습니다. 현재 총동창회 임원이 270여 명 정도 됩니다. 임원 회비를 최대한 철저하게 받을 생각입니다. 총동창회를 총동창회답게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동문 기업 탐방'도 활성화하고자 합니다. 제 임기 동안 최소 30개 이상 탐방해보려고 합니다. 총동창회 회원 자격은 연회비를 5만 원 내는 것인데, 이것도 없애는 방안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도 활성화할 예정이고요. 아무튼, 임기 동안 총동창회가 안 죽고 '꿈틀꿈틀' 살아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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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영 동원건설 대표. / 김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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