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가 아니라 이웃을 보는 정치인이 되겠습니다"

치열했던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기자는 대통령 선거와 관련해 다양한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조회수가 나온 영상은 4월 17일 올린 한은정 창원시의원 영상이었다. '시의원 맞아? 율동 팀 뺨치는 문재인 캠프 한은정 시의원 열정 댄스'라는 제목의 이 영상을 57만 명이 봤다. 밝고 쾌활한 문재인 후보 경남유세단과 한은정 창원시의원의 모습을 널리 알렸다. 밝고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그 모습은 마치 문재인 대통령의 압승을 알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주위에 물어보니 유세 때만 아니라 항상 그랬다고 한다. 그 한결같은 밝은 모습의 원천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세상은 내가 보는 대로 보일 따름이다"

한은정(46) 시의원 사무실은 기대(?)와는 달리 평범했다. 여기 저기 책들과 자료들이 쌓여 있었다. 한 의원은 마치 준비가 됐다는 듯이 거침없이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를 쏟아냈다.

Q. 먼저 고향과 가족 관계부터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이 고향입니다. 줄곧 구 창원지역에서 초중고를 나오고 경남대학교 사회학과에 갔습니다. 우리 집은 1남 3녀로 제가 막내입니다. 아버지께서 마흔일 때 저를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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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정 창원시의원. / 한은정 시의원 제공

Q. 어릴 때 가정 형편은 어땠나요?

"아버지께서 외항선을 타셨습니다. 당시 창원시 상남동은 농사를 짓는 분들이 많았는데, 우리 집은 아버지께서 국내로 오실 때마다 좋은 화장품이나 좋은 물건을 많이 가져오셨습니다."

Q. 아버지께서 막내를 많이 귀여워 하셨겠네요.

"네. 그런데 저는 연세 드신 아버지가 부끄러웠습니다. 마흔에 저를 보셨고 머리가 일찍 세셔서 자칫 젊은 할아버지처럼 보일까 싶었습니다. 비가 오면 항상 아버지께서 학교 교문이 아니라 교실 앞까지 와서 기다리셨습니다. 저는 그게 부끄러워서 '저기 신발 갈아 신는 곳에 계시라'고 했고, 길을 갈 때도 일부러 제가 앞서가고 아버지는 뒤따라 오셨습니다. 그러다 인적이 드문 곳에 들어서면 아버지 팔짱을 끼고 들어가곤 했었습니다. 고3 때 대입 원서 쓸 때도 아버지 대신 오빠가 오라고 했습니다."

Q. 경남대 사회학과를 가셨는데, 사실 사회학이 꽤나 진보적인 경향이 강하지 않습니까? 어릴 때부터 세상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고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정보지' 비슷한 것을 가끔 인쇄해 주셨습니다. 현대 사회의 문제점이나 세상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저는 사회학과라는 곳이 뭔가 다른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곳으로 알고 갔습니다."

Q. 1989년에 대학에 진학하셨는데, 당시는 아직 운동권 영향력이 강하던 시기 아닌가요?

"네, 그렇습니다. 임종석 의장(현 대통령 비서실장)의 이름을 전설처럼 들었었죠. 유물론, 변증법적 접근법 이런 세미나도 해보고, 몸짓도 해보고, 화염병 만드는 것도 옆에서 보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것이 그리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뉴스나 신문을 보고, 학부 수업을 들으면서 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세상에는 항상 동전처럼 양면이 있다는 것, 내가 알고 있고 보고 있는 것은 '있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어쨌든 학생운동까지 나가지는 못했습니다. 평범한 대학생이었습니다. 지금 대학 친구들을 만나면 의아해합니다. '니가 정치할 줄은 몰랐다'는 반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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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은정 창원시의원. / 임종금 기자

Q. 그럼 운동권이 아니라면 대학을 졸업하시고 뭘 하셨는지요?

"그냥 직장 찾아갔습니다. 당시 대교 눈높이 수학이라고 아실 겁니다. 아무래도 다른 직장보다는 많이 받겠다 싶었습니다. 1993년 당시 월급을 180만 원 전후로 받았으니 상당히 받은 셈입니다. 그리고 방문학습을 해야 하니까 차가 있어야 하겠더라고요. 그때 기아자동차 스쿠터를 사서 수업 없는 주말이면 언니들과 함께 전국을 다녔습니다. 참 기억나는 게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보면 아주 상세하게 묘사가 돼 있습니다. 어느 유적 앞에 무슨 가게가 있고, 그 가게에 누렁이 한 마리가 자고 있다는 단락이 있습니다. 그걸 보고 직접 그곳에 가면 정말 그대로 누렁이 한 마리가 있는 겁니다. 정말 신기했고 재미있었습니다. 참, 20대 때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아이 때문에 세상에 나서다

Q. 남편분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습니까?

"소개로 만났고 남편도 나름대로 괜찮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1997년 2월에 결혼했는데, 신혼 때는 별걱정이 없었습니다. 5월에 저는 직장도 그만뒀습니다. 남편 벌이로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10월이 되면서 IMF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심상찮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보너스도 안 나오고, 1998년에 들어서니 아예 월급이 안 나오는 때도 있는 겁니다. 남편은 어쩔 수 없이 작은 회사로 옮기고 수입이 크게 쪼그라들었습니다. 시부모님께서 '이제 너거는 어찌 살끼고?'라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때 시부모께서 봉투를 하나 주는 겁니다. 89만 원인데, 당시 금리가 높아서 1억 원 예금 이자가 매달 89만 원 나오니까 일단 이걸로 버텨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과소비 안 하고, 사치 안 부려도 어려워서 못 사는 세상이 있구나'는 걸요."

Q. 그럼 그 뒤로도 계속 어려우셨나요?

"아뇨, 어쨌든 남편 직장도 서서히 자리 잡았습니다. 중간에 저는 아파트 놀이방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회에 나온 결정적인 계기가 있습니다. 제 아들이 어릴 때부터 덩치도 엄청나게 컸고, 힘도 장사였습니다. 지금 경남체고에 있습니다. 아들이 힘이 워낙 세고 하니까 사고를 치게 됩니다. 그러니 저는 아들 밑에만 붙어서 사고 치는 걸 수습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수습을 할까요? 학교에 잘 보여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당시 학교에서 참 곤란해 하던 것이 교육청에서 하는 행사에 학부모 머릿수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부모 대상 교육은 모두 다 가겠다'고 했습니다. 자살 방지, 금연 교육, 인생살이 교육, 부모 자녀 소통법 등 온갖 교육이 다 있었고 모조리 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시의원이나 도의원이 와서 한마디 하고 가기도 하는데 저는 그분들을 잘 알지는 못했습니다. 아무튼 교육을 다니다 보니 관공서에 자주 들락거리고 서류도 만들어 내면서 조금씩 세상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웠습니다. 또 봉사활동 점수가 자녀에게 '스펙'이 된다는 점을 알고는 우리 애 봉사점수라도 채워주자 싶어서 '낙동강 가족 봉사단'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할머니들에게 밑반찬 돌리고, 이게 하다 보니 재미가 들려서 옷 장사 하는 언니를 통해 남는 옷을 드리기도 하고 재미있었습니다. 별난 아이를 키우다 보니 항상 미안해해야 하고, 먼저 고개를 숙여야 했습니다. 남들은 학교 보내면 아이는 알아서 큰다고 하는데, 저는 아들이 중학교 졸업할 때 '학교 졸업시키는 것이 이렇게 힘들구나!'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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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활동 중인 한은정 시의원. /한은정 시의원 제공

당원 700명 입당시킨 민주당 경남도당의 '전설'

Q. 그럼 정치는 어떻게 입문하시게 된 겁니까? 아까 교육 다니시면서 만났던 시의원 같은 분들이 추천하던가요?

"아뇨 전혀 상관없습니다. 제 형부의 사촌 동생으로 김성원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경남에서 선거전략 이런 것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 분이 저를 쭉 보더니 '정치하면 되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2012년 초에 민주통합당에서 당직자를 뽑는데 도당에 이력서를 써서 갖고 가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력서를 썼는데 적을 내용이 너무 많은 겁니다. 칸을 다 채우고도 모자랄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이력서를 제출하니 담당자가 놀라는 겁니다. '언제 이런 걸 다 하셨어요?' 라고 묻는 겁니다. 당시 장영달 위원장님이 '오시면 도당이 밝아질 것 같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제 직함은 경남도당 여성국장입니다."

Q. 전혀 정치를 모르신 것 같은데, 생소하지 않던가요?

"맞습니다. 첫출근할 때도 집에서 입던 꽃무늬 옷을 그대로 입고 가고, 머리에 핀도 꽂고 갔습니다. 김지수 도의원(당시엔 도당 여성위원장)이 '저기요. 머리에 핀을 좀 빼면 안 될까요?'고 할 정도였습니다. 더 큰 문제는 제가 거의 컴퓨터를 할 줄 모른다는 겁니다. 엑셀 이런 건 전혀 할 줄 몰랐습니다. 업무가 떨어지면 저는 남편에게 부탁해 파일을 올려드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가겠습니까? 얼마 있지 않아 컴퓨터 못 한다는 사실이 들켰습니다. 그래도 장영달 위원장님이 '컴퓨터 좀 못하면 어떠냐. 대통령 선거하면 사람들 관리해야 하는데 그것 좀 맡아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자원봉사자들 관리하고 2012년 대통령 선거를 하면서 당에 익숙해졌습니다."

Q. 2012년에 처음 정치를 시작하셨는데 2014년에 비례대표로 시의원이 되셨는데. 2년 만에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요?

"2012년 대통령 선거에 지고 잠시 할 일이 없었습니다. 정해관 당시 국장이 저에게 당헌·당규집을 주면서 이거나 숙지하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쭉 살펴보는데 비례대표 조항이 있었습니다. 이걸 보니 딱 제가 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정해관 국장에게 '저 비례대표 하고 싶다'고 하자 정 국장이 '당신 같은 아줌마는 못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래도 해보겠습니다'고 하자, 정 국장이 '당에 대한 마음을 파악하는 척도가 당원 모집이다. 당원을 모아오면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그래서 제 친구들하고 아줌마들하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남편과 언니를 교육시켜서 당원을 막 모았습니다. 시아버지는 경찰 출신이라 경우회 모임에 가서 모아오고, 시어머니는 경로당에서 모아오고, 남편은 동창에게서, 언니는 친구들에게서 입당원서를 받아 왔습니다. 심지어 지인 결혼식장에 가면 모두 다 예비당원처럼 저는 보이는 겁니다. 거기서도 입당원서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700명을 받아 왔습니다. 정해관 국장이 놀래서 '당신은 비례대표 하면 된다'고 승낙했습니다. 이게 약간 전설처럼 도당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Q. 아니, 뭐든지 그렇게 열심히 하시나요?

"제가 일하는 걸 보면서 도당에서 '한은정스럽다'는 말이 관용어처럼 쓰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경남도당 위원장 선거를 할 때도 저는 정영훈 위원장님을 밀었습니다. 제가 앞서 받아온 입당자 700명 중에 그래도 한 500명 정도는 남아 있습니다. 그분들을 열심히 준비시켜서 확실하게 찍도록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뭐든지 절박하게 '이게 아니면 안 된다'는 심정으로 했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 경선 때 저는 이재명 시장이 안 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절박하게, 본선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안 되면 절대 안 된다는 심정으로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세 동영상에서 제가 외투를 벗고 춤을 추는 장면도 그냥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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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9일 가동 중단한 고리 1호기 폐로에도 목소릴 낸 한은정 시의원. / 한은정 시의원 제공

창원광역시 문제, 행정체계 개편으로 풀어야

지난 얘기나 선거 얘기를 듣다 보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말을 돌려 창원시 현안에 대해 물어봤다.

Q. 단도직입적으로 단순하게 묻겠습니다. 안상수 시장이 창원광역시 추진하는 데 찬성하십니까? 반대하십니까?

"지금 대한민국 지방행정체계가 3단계로 돼 있는데, 이걸 노무현 정부 때 2단계로 만들려 했습니다. 지금의 광역시도를 없애고 시군을 통합해 전국을 50~70개 정도 되는 2단계 행정단위로 재편하는 겁니다. 특히 영호남 접경지역을 통합할 경우 지역주의도 없앨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측면에서 창원시가 지금 경남도 소속이 아니라 전국 50~70개 행정단위 중 하나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Q. 사무실 벽에 주남저수지 사진이 붙어 있는데 특별히 신경 쓰시는 점이 있으십니까?

"제가 관심 가지는 것 중 하나가 주남저수지와 주변을 어떻게 잘 보전하느냐입니다. 주남저수지에 낚시터가 추진될 때 열심히 막으러 다녔습니다. 또 철새가 날아오려면 저수지에 어느 정도 모래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는 수위를 낮춰야 합니다. 그런데 농어촌공사에서 주남저수지에 물을 뺄 수 없다고 할 때 시장님께 찾아가 설명해서 물을 빼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알음알음 현장을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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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 유세 중 인터뷰하는 한은정 시의원. / 한은정 시의원 제공

Q. 창원시를 어떤 도시로 만들고 싶습니까?

"시정 방향이 변해야 한다고 봅니다. 창원시는 산업화에 맞춰 계획된 도시입니다. 모든 시정이 거기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지금은 방향이 변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산업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에 놓여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보면 성주사 진입로가 예전엔 참 운치 있고 좋았습니다. 비 오는 날 걸으면 체코 프라하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올라가는 길을 산단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운치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산단이 널렸는데 또 산단을 짓는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마산지역에 있던 쌍용 시멘트 사일로, 옛 삼광청주 공장 같은 건 얼마나 아깝습니까? 물론 당장엔 아무 쓸모가 없지만 그런 공장에서 어르신들이 열심히 일해서 일군 게 지금 우리나라 아닙니까? 산업구조물에 세련된 인문학적 가치를 얹어줄 수 있는데 다 없애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역사 배운답시고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 유물을 박물관에 봅니다만 바로 30~40년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다면 어떻게 제대로 역사를 아는 것이겠습니까? 마산만을 매립해 짓는 해양신도시 같은 것도 저는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가능하다면 다시 퍼내서 원상복구시키고, 그게 비용 때문에 어렵다면 갯벌이나 생태하천으로 돌려주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용지호수를 걸으면 예전에는 하늘이 훤히 보였습니다. 이제는 높은 건물들 때문에 하늘이 훤히 보이질 않습니다. 내 하늘을 빼앗긴 기분입니다. 광역시보다 이런 점에서 시정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봅니다."

Q. 혹시 다른 민생이나 현안에 대해 말씀하실 것이 있나요?

"사람들 삶이 어렵다는 것이 제가 스스로를 돌아봐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제가 1990년대 초반에 월급으로 180만 원 받았습니다. 20년 넘게 지났지만, 아직도 이것보다 적게 받는 분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제가 결혼하면서 산 롯데아파트가 당시엔 2500만 원이었습니다. 지금 근 3억이 됩니다. 임금은 10배로 오르긴커녕 제자리걸음인데, 집값은 10배로 올랐습니다. 결국 있는 사람 아니면 죽기 살기로 모으거나 큰 빚을 내야 집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내수가 살고 경기가 살 수 있겠습니까? 일개 시의원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만 이런 걸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저는 약간의 곡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남들보다는 편하게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인으로서 위에 청와대나 여의도 이런 것에 마음을 쓰지 말고, 제 주변 시민들을 항상 살피고, 그분들 입장에서 생각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작은 아이디어라도 하나 생기지 않겠습니까?"

발랄하게 시작됐던 인터뷰가 무겁게 마무리됐다. 그의 지금 모습은 어찌 보면 우연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아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회에 나섰고, 우연히 당직자로 일하게 됐고, 우연히 비례대표 규정을 보게 됐다. 하지만 '한은정스럽다'라는 문구로 설명되는 그의 열정과 집중력을 생각해 봤을 때, 어떤 형태건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됐으리라. 결국 지금 그의 모습은 우연의 연속으로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 '운명'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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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7월 21일에 열린 창원시 미래전략 공청회에 참여한 한은정 시의원. / 한은정 시의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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