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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발길 끊긴 인공댐, 물총새 둥지로 물풀 고향으로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과 경남도민일보가 함께하는 습지 문화 탐방] (8) 남강댐 진양호
평균 강우량 1519㎜ 남강 홍수 방지·전력 생산코자 만든 댐 식수 공급하며 개발 제한
물길 곁 자리잡은 습지 걷고 누리는 '즐거움'선사, 집터 등 유적 삶 비추기도

공동취재단 webmaster@idomin.com 2017년 06월 29일 목요일

◇남강댐=진양호의 역사

우리는 남강댐=진양호를 잘 모른다. 박정희 시절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으로 8년 공사 끝에 저수용량 1억 3630만t으로 1969년 준공되었다는 정도만 안다. 좀 더 보태면 계획홍수위를 40.5m에서 46m로 5.5m 높이는 보강공사를 1989~2003년 벌여 저수용량을 3억 920t으로 2.3배가량 늘렸다는 사실이 보태진다. 남강댐은 진주·사천·고성·통영·거제·하동·남해에 연간 생활·공업용수 2억 2440만t과 농업용수 2억 2680만t을 공급하고 전기도 해마다 4130만kWh를 생산하고 있다. 남강댐은 홍수 조절 기능도 한다. 200년에 한 번 닥치는 홍수를 기준으로 최대 유입량을 초당 1만 400t으로 잡았다. 4050t(남강 본류 800t 가화천 3250t)은 방류하도록 했고 남는 6350t은 댐에 담아두도록 했다. 69년 준공 당시는 최대 유입량 1만 570t에 방류량 남강 본류 2000t과 가화천 5460t으로 모두 7460t이었다. 보강공사로 저수용량이 2배 이상 늘면서 방류량은 남강 본류와 가화천 모두 크게 줄였다.

알고 보니 앞선 역사가 파란만장했다. 남강댐의 시작은 1920~25년 조선총독부가 세운 '낙동강 개수(改修)계획'이다. 남강 일대와 낙동강 하류(삼랑진~하단) 홍수 방지가 목적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낙동강 본류 연안 공사와 부산 운하 건설이 포함된 이 계획에서 남강댐과 방수로 위치를 정하고 1926~34년 공사했다. 1936년 시작된 방수로 공사는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토석 200만㎥를 파낸 상태(공정률 70%)로 중단되었다. 해방 이후 1949년 미국 원조로 다시 착공하지만 이듬해 6·25전쟁이 터지면서 또 중단되었다. 남강댐은 세계사적 사건으로 착공과 중단을 반복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일제 조선 지배 정책은 남쪽 농업 북쪽 공업(南農北工)이었다. 남쪽 평야지대는 일본 식량 공급기지로, 북쪽 산악지대는 풍부한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군수산업을 일으켜 대륙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일제강점기 건설된 댐은 주로 북한에 있다. 압록강 수계에 수풍댐을 짓고 부전강·장전강에 유역변경식 댐을 지었다. 수량이 풍부하고 협곡이 발달해 수력발전이 손쉬웠기 때문이다. 남한에는 해방되고 나서 1960년대에야 대형 댐이 제대로 착공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도 남강댐만은 90년 전인 일제강점 초기에 계획되고 착공되었다. 왜일까?

◇상습 수해지역 진주

남강댐물문화관에 가면 일제강점기 신문이 있다. 이를 보면 오래전 남강댐을 지으려 한 까닭이 짐작된다. "사천·삼천포 200채 무너져"(25년 9월 11일 자), "진주 300채 물에 잠겨/ 인명 피해도 적지 않아"(29년 7월 1일 자), "폭우 다시 쏟아져 단성에 통곡소리"·"진주 수곡면 수재로 20채 남짓 휩쓸려"(29년 7월 4일 자), "진주 침수"(32년 8월 8일 자), 33년 7월 2일에는 "폭우 지나간 남도 수해 속보"라고 호외까지 내었다. "굶주림에 우는 수만 생명/ 가정집 물은 흙탕물에 쓸려가고/ 재해에 성홍열·복통 등 전염병 발생"·"남지교도 무너질 듯/ 낙동교 크게 위험"·"남강도 범람해 진주 50채 쓸려가" 등. 35년 9월 11일 자는 "진주 침수만 300만 평/ 경남 지역 자동차 전부 불통"이었고 36년 8월 15일 자는 "경남 2000채 남짓 침수/ 굶주림과 추위에 우는 1만 이재민/ 논밭 510만 평 물에 잠겨"·"삼랑진·구포 물바다"·"삼랑진 제방 무너져 1500명 피난"·"구포 제방도 위험"이었다.

낙동강 전체 유수량의 27%를 남강이 차지한다. 연간 평균 강우량이 전국 1200㎜보다 1.3배 많은 1519㎜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서쪽 백두대간과 남쪽 낙남정맥 때문에 빗물은 내륙으로 몰린다. 조선총독부가 진주 시가지 홍수 피해를 없애고 낙동강 본류 하류의 제방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려면 남강댐만으로는 모자라고 별도 방수로로 물을 빼내어 수위를 낮출 필요가 있다고 본 원인이다. 그래서 1936년 홍수를 계기로 진주 상류 4㎞ 지점에서 가화천을 거쳐 사천만 바다로 이어지는 방수로(너비 40m, 깊이 4m, 길이 11㎞)를 내는 공사를 서둘렀다.

◇인공 댐에 들어선 자연생태

남강댐은 식수 공급원이 되면서 개발행위가 제한되었다. 자연환경이 좋아지면서 멸종위기동물인 수달이 되살아나 일대가 진양호수달서식지야생동물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이 밖에 진양호 야생동·식물보호구역과 대평야생동·식물보호구역이 더 있다.)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는 노루·고라니·멧돼지·산토끼·삵 같은 짐승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모래 언덕에 물총새가 둥지를 틀었고 딱따구리 나무 쪼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려오게 되었다.

대평면소재지에서 지방도 1049호선을 타고 남쪽으로 상촌리에 가면 보이는 대평습지.

남강댐은 습지도 새로 만들었다. 골풀·세모고랭이 같은 물풀이 물과 뭍의 경계에서 자라고 마름은 물 위에 떠 있거나 말즘은 물속에서 흐늘거린다. 조금 위에는 버들이 부풀어 올라 있고 좀 더 높은 확실한 뭍에는 조그만 소나무가 군데군데 자란다. 갯버들이나 물버들은 습지의 육지화를 일러주는 지표고 소나무는 거의 육지가 되었다는 지표다. 예전에는 뭍이었지만 지금은 물에 잠긴 곳에서는 요절한 어린 고사목(枯死木)들이 몸통을 드러내고 있다.

◇개성 뚜렷한 습지들

지역에 따라 나누면 대충 이렇다. 통칭이 못 되고 가칭은 되겠다. 대평 습지는 대평면소재지에서 지방도 1049호선을 타고 남쪽으로 상촌리에 가면 나타난다. 왼편으로 물속에 수풀이 있고 고사목도 보인다. 똑같이 물에 잠긴 자리지만 한편에 무엇이 새로 자라고 한편에는 무엇이 스러지고 있다. 상촌리 지난 다음 남행하면서 왼편으로 창고 건물이 있는 사거리에서 왼편으로 들면 사평(沙坪)마을 일대 사평 습지다. 언덕과 비탈이 사암인데 남강댐을 향하는 내촌천은 거의 모래(沙) 들판(坪)이다. 육지화가 빨라 버들도 많지만 소나무도 띄엄띄엄 자란다. 재빠른 침식 때문에 옛적 콘크리트 도로가 들려 있는 데도 많다.

완사천이 남강댐으로 흘러드는 어귀에 자리 잡은 완사습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원시림이고 원시천이다.

사천 곤명면 금성마을은 덕천강이 흘러드는 어귀다. 덕천강 쪽으로는 연강정(練江亭)과 어우러지고 남강댐 쪽으로 버들이 무리를 지었다. 금성교 위에 서면 둘 다 보인다. 이름붙이면 금성습지가 될까. 완사습지는 완사천이 남강댐으로 흘러드는 어귀에 있다. 작팔교와 만지교에서 전경이 보인다. 만지교는 완사천 남강댐 합류 직전 지방도 1001호 선상에 있다. 작팔교는 상류로 지방도 따라 1㎞ 남짓 더 올라가 오른쪽 작팔길 방향으로 2㎞ 남짓 가면 나온다.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원시림이고 원시천이다. 물줄기는 굵고 가는 모래를 깔면서 흐르고 양옆으로 풀과 나무가 자란다. 오미천과 일대 오미습지에도 비슷한 풍경이 있다. 완사습지에서 대각선으로 남강댐 건너편이다. 여기 대전~통영고속도로 다릿발 아래(오미리 1035-1)에는 남강댐 수몰 이전 옛날 다리도 있다.

완사습지와 비슷한 풍경의 오미습지.

까꼬실(=귀곡동)습지는 사평마을을 지나 남강댐 가장자리 흙길·콘크리트길을 따라 한참 들어간 다음 옛날 논밭 자리(대평면 내촌리 581-4)에 자동차를 세우고 황학산을 넘어야 한다. 2㎞ 남짓 산길인데 가파르지는 않지만 만만하지도 않다. 까꼬실은 섬이 아니지만 남강댐 때문에 육지 속 섬이 되어 있다. 진양호공원 선착장에서 까꼬실 가는 배가 뜨는데 지역주민만 탈 수 있다. 까꼬실에 민가가 없고 죄다 바깥에서 배를 타고 가서 농사를 짓기 때문이다.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16㎞ 남짓 둘러보았더니 습지가 곳곳에 확인되었다. 학교터는 건물은 없고 운동장에는 풀만 가득했다. 그늘이 넉넉했을 플라타너스 세 그루가 고사해 있고 기능을 잃은 전봇대 네 개가 나란했다. '충효'라 적힌 빗돌 뒤로는 파초가 남아 자라고 있었다.

까꼬실습지. 남강댐 때문에 육지 속 섬이 되었다.

남강댐은 습지를 곳곳에 만들었지만 사람들 관심은 적다. 지금 이대로 두어도 남강댐 둘레 습지들이야 망가지거나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걷고 보고 누리는 자체가 즐겁기도 하거니와 그런 걸음을 통해 남강댐 같은 인공의 산물조차 제대로 관리하고 개입하면 멋진 습지를 베푼다는 사실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대평리 신석기~삼국시대 유적

남강댐은 또 '진주 대평리 유적'을 선물로 남겼다. 1975~99년 이어진 발굴에서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삼국시대 유적이 확인되었다. 생활도구와 장신구가 출토되었고 집터·마을 터·무덤·밭터도 나왔다.(논터는 나오지 않았지만 논농사를 짓지 않은 것은 아니라 한다. 수몰 지역 발굴이라는 한계로 발굴 지역에 논터가 포함되지 않았을 뿐이라 한다.) 고고학계에서는 청동기시대 사회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충분히 얻은 발굴이라 평가하는데 어쨌든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습지에 기대어 삶을 이을 수밖에 없었음을 한 번 더 입증하는 유적이라 하겠다. 지금 진주시 대평면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에 갈무리되어 있다.

주관 :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

문의 : 환경교육팀 055-533-9540, gref2008@hanmail.net

수행 :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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