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11번째 슬로시티인 하동군 악양면이 조선시대 향촌 규약을 제정·공포한 것은 눈길을 끈다. 슬로시티 운동은 패스트푸드의 대명사 맥도널드가 이탈리아 로마에 입점하자 이를 반대하면서 추진된 슬로푸드 운동을 모태로 삼고 있다. 슬로시티 운동은 지역성, 환경, 전통의 가치를 소중히 함으로써 지속가능하고 생태친화적인 지역사회를 일구려는 흐름이다. 슬로시티는 공해를 유발하는 2차 산업에 의존하지 않고 1·3차 산업이 주축을 이루는 지역에 적합하다. 이 점에서 지리산, 섬진강, 벚꽃·매화 군락 등 천혜의 자연과, 소설 <토지>의 고향, 유서 깊은 사찰들, 화개장터, 녹차 생산지 등 인문 환경이 풍부한 하동군은 슬로시티에 안성맞춤인 지역이다.

이번에 하동군 악양면이 지역사회 자치규약으로서 향약을 제정한 것은 그동안의 슬로시티 사업이 관광 측면이나 외형에 치우쳤다는 반성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슬로시티로서 내실을 기하고 심층성을 더하려는 노력으로 평가할 만하다. 향약과 슬로시티는 자치, 협동, 지역공동체를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서로 맞물리는 측면이 있다. 지난해부터 악양면 주민들이 향약 제정을 논의한 과정도 자치와 자율을 중시하는 향약 정신에 부합한다. 관에서 정한 결정이 주민에게 하달과 집행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들더라도 지역민의 참여를 통해 결정된 것도 슬로시티 이름에 합치하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슬로시티 악양주민협의회, 악양면발전협의회, 한국슬로시티본부 등 악양면과 슬로시티 관련 기관들이 두루 참여했다.

물론 슬로시티가 전통문화 계승을 중시하지만 전통은 시대에 맞게 선별하는 것이 옳다. 이 점에서 유교 도학자들의 이념이 구현된 향약을 무작정 되살린다면 시대착오적이거나 무모한 것일 수 있다. 충효 같은 봉건이념에 집착하지 말고 상부상조와 긍휼 등 향약의 연대 정신을 계승하면 좋을 것이다. 향약 규약이 법적 강제성이 없으므로 자칫 상징성으로 그칠 우려도 있다. 수려한 자연환경을 위해 개발을 억제하는 등 주민들로서 손해를 감수할 것들도 적지 않다. 이런 난관도 협동과 연대의 정신으로 극복하여 슬로시티 확산에 기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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