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9일, 경남도민일보 시민사회부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경남 지역의 고등학교에 '작은 (위안부)소녀상'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해당 SNS 게시물에는 "고등학생들이 참 대견합니다"라는 설명이 달렸다. 나는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로서, 내가 이 설명에 느끼는 문제의식을 공유하려고 한다.

청소년은 소수자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유색인종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일상에서 차별과 배제를 경험한다. 청소년이 염세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진지한 고민을 얘기할 때면 '중2병'이라는 말로 질병인 듯 취급하고, 여성청소년이 소녀다움을 탈피하여 주체적으로 성적 매력을 어필할 경우 '룸나무(룸살롱+꿈나무)'라며 성적 대상화한다. 무상급식이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자 복지에 무임승차한다며 비꼬기 위해 '급식충'이라는 말이 생기는가 하면, 청소년을 고려하지 않는 비청소년 중심적인 공간에서 일방적으로 청소년을 배제하는 '노키즈존'이 성행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대표적인 '청소년 혐오표현'이다.

'대견하다'는 표현 또한 청소년 혐오로 작용한다. 위안부 소녀상 설립 운동에서 청소년은 다른 비청소년 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주체성과 의식, 그리고 신념을 가지고 함께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청소년 운동가와 청소년 운동가에게 내려지는 평가는 명확히 다르다. 그 어떤 비청소년 운동가의 위안부 소녀상 설립 운동도 '대견하다'고 평가받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행위에 대해 '멋지다', '훌륭하다'고 평가받을 뿐이다. 하지만 청소년 운동가에 대한 평가는 '대견하다', '기특하다' 따위의 수식어가 붙는다. '훌륭하다'와 같은 말로 표현될 때는 반드시 그 앞에 '학생들이-'나 '어린 애들이-' 따위의 수식어가 더 붙는다.

청소년과 비청소년이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비청소년은 행위에, 청소년은 '어린 나이'와 같은 정체성에 대해 평가받는다. 청소년의 정체성에 대한 평가인 '대견하다'는 청소년의 주체성을 생략한다. 위안부 소녀상 설립 운동에서 청소년이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대견한' 청소년은 그저 조금 특이한 타자, 특수한 타자, 미성숙하지만 대견하고 기특한 타자로 남을 뿐이다.

청소년을 타자화하는 '정체성 평가'는 때로는 숭배의 형태로, 때로는 멸시와 공포의 형태로 드러난다. 위안부 소녀상 설립 운동에 함께하거나, 촛불 집회에 참석하는 청소년은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기특한', 그리고 '대견한' 존재가 된다. 반면, 청소년이 범죄를 저지르거나, 비청소년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술과 담배를 할 경우 '잔혹한 청소년 범죄'나 '무서운 10대'라는 표현으로 소비된다. 사실 강력범죄를 가장 많이 저지르고, 음주 후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거나 흡연율이 가장 높은 집단은 비청소년 남성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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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소하게 내뱉는 언어표현 속에 청소년을 타자화하는 인식이 숨어있다. 우리는 의도치 않게 청소년을 혐오하고 배제한다. 필요한 것은 성찰이다. 우리 사회에서 다른 소수자에 비해 그 약자성이 알려지지 않은 청소년이 겪는 차별과 배제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누구를 대하든 나이와 정체성을 떠나, 나와 동등한 한 명의 인간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이는 청소년을 대하든, 유아를 대하든 똑같이 적용되는 명제이다.

독자들이 현실에서 청소년을 대할 때 이 내용을 실천할 수 있도록, 야누시 코르차크의 말을 옮겨본다. "어린이(청소년)는 없다. 다만 사람들이 있을 뿐." 이 말만 분명히 기억하고 새기면 실천적 방법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분명히 기억해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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