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산] (14) 함안…함안 대표하는 770m 여항산
남강·낙동강 범람 잦은 탓에
지역민 피난처이자 삶터 역할
정상 오르면 충적평야 아늑
한국전쟁 아픔 간직한 서북산

함안군 지형은 독특하다. 도내 대부분 지역은 임야 비율이 60∼70%에 이를 정도로 산지가 많고 주로 북쪽에 자리 잡아 북고남저 지형을 이루고 있다.

함안은 여항산(艅航山·770m), 서북산(西北山·739m), 오봉산(五峰山·525m), 방어산(防禦山·530m) 등 비교적 높은 산이 남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임야 비율도 52.14%(215.61㎢)로 다른 곳에 비해 적다. 북쪽으로는 낙동강과 남강이 흐르면서 남고북저 지형이 형성돼 있다.

특히 두 강으로 흘러드는 여러 지류를 따라 충적평야가 발달하면서 선사시대부터 싹트기 시작한 문화는 아라가야로 이어지면서 찬란하게 꽃피었다.

여항산 어원처럼 정상 바위가 산꼭대기 위에 올려놓은 배처럼 보인다. 뒤쪽으로는 우뚝 솟은 서북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유은상 기자

단순히 주어진 풍족한 환경 덕분은 아니었다. 강의 범람은 잦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 속에 탄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함안 사람에게 산은 더 가치 있다. 지금이나 그때나 산은 물리적 심리적으로 든든한 배경이 됐다. 피난처이자 삶터였던 셈이다. 함안의 진산이자 주산인 여항산은 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여항산에서 이어진 지맥과 그 산자락 아래에 터전을 만들었고 그 흔적은 성산산성, 말이산 고분군 등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특이한 지형에 얽힌 여항산 유래

여항산은 함안군 여항면 주서리·강명리 일원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에 걸쳐 있다.

백두대간이 끝나는 지리산 영신봉에서 동남쪽으로 흘러 김해 신어산까지 이어지는 낙남정맥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지리산권을 제외하면 낙남정맥에서 가장 높다.

여항산이란 이름은 물이 범람해 모든 것이 다 잠기고 꼭대기 배만큼만 남았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현재는 '배 이름 여(艅)'에 '배 항(航)'을 사용하고 있지만 <경상도지리지> 등 조선시대 대부분 기록에는 '남을 여(餘)', '배 항(航)'으로 표기했다. 한자 뜻 그대로 '배만큼만 남았다'로 풀이되다 18세기나 19세기에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항산 울창한 소나무가 등산객을 반긴다./유은상 기자

또 1586년 군수로 부임한 정구(鄭逑)가 남고북저 지형 탓에 역모의 기운이 있다고 여겨 풍수적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설도 있다. 산이 높은 남쪽은 배가 다닐 만큼 낮다는 뜻에서 여항(餘航)으로, 지형이 낮은 북쪽은 대산(代山)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항, 대산은 그 이전부터 사용하던 지명이라 설득력이 낮다.

함안은 젖줄인 남강과 낙동강이 매년 범람하는 상습 침수지역이었다. 이를 방지하고자 강과 하천 주변으로 둑을 쌓았고 결과적으로 함안군은 국내에서 가장 긴 둑(338㎞)을 가지게 됐다. 이런 사정에 비추어볼 때 과장되긴 했지만 여항산 대부분이 물에 잠기고 꼭대기 배만큼만 남았다는 설명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이 밖에도 물이 산꼭대기까지 차올라 정상에 각(곽) 하나만 놓을 자리만 남았다는 데서 '각(곽)데미 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고자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고, 큰 피해를 본 미군이 '갓댐(goddam·제기랄, 빌어먹을)산'이라 부른 것이 또 다른 유래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여항산에는 8개 공식 등산코스가 있다. 대부분 사람은 좌촌마을에서 시작하는 3개 코스 중 하나를 선택한다.

포장길이 끝나는 지점부터 울창한 소나무숲이 등산객을 맞는다. 30도를 넘어서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숲 속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가뭄 탓에 온 나라가 걱정이지만 오히려 산행에는 도움이 됐다. 낮은 습도 때문에 산아래서 불어오는 바람이 신선하다. 발걸음 또한 가볍다.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경사는 가팔라지지만 그렇게 힘에 부치지 않는다. 잠시 바위에 궁둥이를 붙이고 쉬면 그만이다. 가슴을 넓혀 심호흡을 하다 보면 땀은 금세 식고 가쁜 숨길도 잠잠해진다. 숲은 생각보다 울창하다. 1970년 이 산에서 표범이 잡혔다는 신문보도가 믿어진다.

능선에 올라서면 곧장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예상보다 큰 바위 봉우리가 떡하니 위용을 과시한다. 여느 유명 산과 비교해도 모자람 없이 당당하다. 급경사를 오르는 나무 덱이 놓여 예전보다 긴장감은 적지만 역시 만만치 않다.

정상에 서면 다시 놀라게 된다. 발아래 천 길 낭떠러지에 먼저 놀라고, 탁 트인 조망에 다시 감탄한다. 가을 어느 멋진 날에만 만날 수 있는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이 펼쳐져 있어 감동은 더 깊다. 특히 저 멀리 남강까지 펼쳐진 넓은 평야가 아늑하다. 몸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면 만나게 되는 층층이 출렁이는 산그리메도 일품이다.

현대사 고스란히 품은 서북산

여항산과 인근 서북산은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다.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전투가 치열했던 곳이다. 서북산은 함안군 여항면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진전면 경계에 있다. 여항산에서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3.7㎞ 거리다. 깊은 사연만큼 산 이름에도 뭔가 특별한 의미가 숨어 있을 듯하지만 진북면 서북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란다.

정상표지석 아래에 서 있는 '서북산 전적비'는 당시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1950년 8월 미군과 국군은 마산 일대를 지키고자 총력을 쏟았다. 미 제25사단이 새로 투입되면서 진주 일대에 주둔하던 북한군 정예 2개 사단을 공격했지만 지형적 이점을 살린 북한군의 거센 저항에 피해만 보고 물러난다. 결국, 미군은 마산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했고, 한시가 급한 북한군은 부산으로 진격하고자 총공세를 퍼부었다. 미군과 국군 또한 이곳이 무너지면 한순간에 부산까지 쉽게 내줄 수밖에 없어 목숨을 걸고 저지했다.

등산로에서 만난 장승이 웃음을 전한다./유은상 기자

전투는 9월 15일까지 45일간 밤낮없이 이어졌고 서북산 정상 주인은 19차례나 바뀌게 된다. 결국, 미 제25사단 제5연대가 북한군을 격퇴하면서 유엔군의 총반격작전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중대장 로버트 티몬스 대위와 장병 100여 명이 산화했다.

이후 아들인 주한 미8군 사령관 리처드 티몬스 중장과 제39사단 하재평 소장을 비롯한 장병, 지역 주민이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자 1995년 11월 전적비를 세웠다.

서북산 너머에는 그때 그들이 보았을 진동만과 멀리 진해만 바다가 여전히 파랗게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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