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 문화 탐방] (7) 창녕 우포늪(소벌)
화왕·열왕산이 내린 물줄기231만 2926㎡ 생명의 보고로
늪 가장자리 개간한 '논밭'나무·진흙·물억새로 지은 집 자연 속 '삶의 흔적'보여줘
토평천 범람 막은 한강 정구 조선 토목건축 사례 비추기도

◇국내 최대내륙습지의 함의

창녕 우포늪은 우리나라 내륙습지 가운데 가장 크다. 우포·목포·사지포·쪽지벌 넷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포는 127만8285㎡, 목포는 53만 284㎡, 사지포는 36만4731㎡, 쪽지벌은 13만 9626㎡다. 모두 더하면 231만 2926㎡, 대략 70만 평인데 2012년 2월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면적은 주변까지 포함하여 3배가 넘는 850만㎡다.

우포늪은 토평천이 낳았다. 토평천은 창녕에서 가장 높은 화왕산과 그 북쪽 열왕산에서 흘러내려 고암면 청간마을에서 물줄기를 제대로 이룬다. 토평천은 비탈진 골짜기를 빠르게 흐르다가 고암면 중대·도야마을에서 중대천·도야천을 만나 느려진다. 함께 흐르던 흙·모래·자갈·돌들이 쌓여 평평하고 너른 벌판이 생겼고 사람들은 이를 논밭으로 일구었다. 논밭은 대지면 효정·모산리를 지나 창산교 하류까지 이어진다.

환경부는 창산교를 우포늪 습지보호지역의 공식 시작지점으로 삼았다. 굳이 따지자면 우포늪은 1km 남짓 더 내려가야 만난다. 습지보호지역에서는 농약·화학비료를 쓸 수 없고 낚시질도 할 수 없다. 습지보호는 바로 맞닥뜨려 하는 대신 거리를 두고 해야 나쁜 물질을 넉넉하게 걸러낼 수 있다. 습지보호지역이 공식 끝나는 지점도 마찬가지다. 우포늪의 막내격인 쪽지벌을 한참 지난 2.5km 즈음이다.

생각해 보면 우포늪도 바로 위쪽 논밭과 다를 바가 없다. 두 곳 다 평평하고 널찍하다. 예전에는 수풀 우묵하게 자라는 다같은 습지였다. 그럼에도 왜 위쪽은 논밭이 되고 아래쪽은 옛날 그대로 습지로 남았을까? 간단하다. 홍수 시기 낙동강이 역류하는 정도에 따라 농지와 습지의 경계가 결정되었다. 아래쪽은 큰물이 지면 토평천이 넘쳐흘러 범람하기 때문에 농지로 개간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위쪽은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기에 개간이 가능했다.

거룻배가 있는 우포늪 풍경.

그런데 낙동강 건너편 함안은 습지가 창녕보다 더 많았다. 지금은 함안은 습지를 대부분 잃었고 창녕은 그렇지 않다. 왜일까? 가장 큰 차이는 창녕에서는 없어진 그 습지가 대부분 농지로 바뀌었지만 함안에서는 대부분 주택이나 공장이 되었다는 데 있다.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2014년 12월 펴낸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우포늪-소벌·나무벌·모래벌·쪽지벌> 42~47쪽을 정리하면 이렇다. '1918년에서 2009년 사이 창녕 습지는 783㏊에서 350㏊로 433㏊ 줄었다. 그 원인을 알아봤더니 92%가 농경지(제방 포함)로 바뀌었다. 나머지 8%는 도로였다."

함안에서는 습지를 메워 주택과 공장을 지으면서 옆에 있던 습지까지 없앴다면 창녕에서는 습지를 개간하여 거의 전부 농지로 만들면서 옆에 있던 습지는 농사짓는 데 활용하기 위해 그대로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습지를 논밭으로 활용하는 것은 시대 상황에 따라 충분히 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남게 된 습지를 계속 보전하는 데에도 어쩌면 보탬이 된다는 얘기다.

우포늪 둘레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다. 우포늪 가장자리를 개간해 장만한 논밭은 기본이었다. 이에 더해 마름 열매(말밤)·가시연꽃 씨앗·올방개 뿌리 등등까지 식용으로 썼다. 잉어나 붕어·가물치 같은 물고기에 더해 논고둥까지 반찬으로 삼거나 장에 내다팔아 살림살이에 보탰다. 사는 집도 마찬가지였다. 주변 야산의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걸쳤으며 조개껍데기 박힌 진흙을 개어 벽으로 삼았다. 담장을 쌓을 때는 늪바닥 진흙이 굳어 만들어진 이암(泥岩=썩돌)을 진흙과 함께 넣었고 지붕을 이을 때는 볏짚은 물론 갈대와 물억새까지 베어다 말려 썼다. 이런 자취들은 세진·장재·신당·주매·대대마을 등 곳곳에 남아 있다.

◇신당마을에 남은 기와집

사지포와 등을 맞대고 있는 대합면 신당마을에는 구조가 독특한 기와집이 한 채 있다. 먼저 앞쪽에는 가운데 대문을 낀 행랑채가 있다. 대문 안쪽에 사랑채는 없고 안채만 오른편에 있다. 소마구는 안채 저쪽에 있고 곳간은 정면 맞은편에 있다. 가장 색다른 것은 안채였다. 좁은 공간에 지붕기울기를 지나치게 가파르지 않게 하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았는데 먼저 용마루가 지나치게 짧았다. 부엌도 좌우에 하나씩 방을 끼고 만들어져 있어서 오른편에 있는 여느 경우와 달랐다. 방 두 개에 앞마루를 달아붙인 것은 예사로웠지만 한가운데 대청이 없고 대신에 안채 왼쪽 전체의 4분의1이 대청마루여서 독특했다.

신당마을에 있는 구조가 독특한 기와집.

어쨌거나 이렇게 별난 구조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동네 할매들한테 물었다. 사랑채는 애초 없었고 그래서 행랑채 한 칸이 바깥주인 거처였다고 했다. 용마루가 왜 좁은지 대청이 왜 넓은지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다만 집주인이 논밭을 대략 30마지기 넘게 하는 작지 않은 자작농이었고 그래서 동네 머슴 둘을 썼다는 얘기는 들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구조가 독특하고 지은 지 50년은 충분히 지난 듯해서 누구든 조금만 관심을 갖고 애를 쓰면 완전히 허물어지기 전에 어렵지 않게 문화재 공식 지정이 가능할 것 같았다.

◇물슬천, 그리고 우포와 누포

지금 토평천을 옛적에는 물슬천(勿瑟川)이라 했다. 물(勿)은 물(水)을 나타내는 한자 소리고 슬(瑟)은 동쪽을 뜻하는 옛적 토종말 '쇠' '소' '새'를 나타내기 위한 한자 소리이며 천(川)은 시내를 가리키는 한자 뜻이다. 큰물(낙동강) 동쪽에 있는 시내가 바로 물슬천이다.

우포의 옛 지명은 두 개가 확인된다. 하나는 누포(漏浦)인데 <대동여지도>(1861년)에 '물슬천'과 함께 적혀 있다. 누(漏)는 앞에서 본 슬(瑟)과 마찬가지로 동쪽을 이르는 옛 토종말 '쇠' '소' '새'를 적기 위한 한자 소리이고 포(浦)는 물가를 뜻한다. 다른 하나는 지금과 같은 우포(牛浦)인데 <지방지도>(1872년) 창녕편에 나온다. 우포에서 우(牛)도 옛적 토종말 '쇠' '소' '새'를 나타내기 위하여 종종 불려나오곤 했던 한자 소리다. 그러므로 둘을 아우르면 누포든 우포든 (낙동강) 동쪽에 있는 습지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하지만 지금은 우포가 모양이 소(牛)를 닮아서 붙은 이름이라는 얘기가 더 널리 퍼져 있다. 실제 우포와 목포를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가르는 산자락이 소가 입을 입을 벌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대동여지도>에는 물슬천 서쪽에 우항산(牛項山)이 표기되어 있다. 우항은 우리말로 소목이다. 지금 소목과 우항산은 앞서 소가 입을 벌린 것 같은 그 산자락에 있다.) 이렇게 짐작해 보면 어떨까. 처음에는 어찌되었든 1800년대 후반부터 우리말 발음 '소'가 동쪽을 뜻하는 기능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소'라 하면 대부분은 소(牛)를 떠올리게 되었는데 옆 산자락이 소대가리처럼 생기기까지 하였다.

◇팔락정과 가항에 담긴 이야기

창녕에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라는 인물이 1577~80년 창녕현감으로 있었다. 경북 성주 출신으로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한테서 두루 배웠다. 당시 수령은 칠사(七事)-농상성(農桑盛)·호구증(戶口增)·학교흥(學校興)·군정수(軍政修)·부역균(賦役均)·사송간(詞訟簡)·간활식(奸猾息)을 잘해야 했다. 정구는 이를 두루 잘해 백성들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했다.

학교흥을 위하여 마을마다 정자를 세우고 서당으로 삼았다. 모두 여덟이었는데 미구마을에 남아 있는 것은 팔락정이다. 여기 정자 이름을 팔락(八樂=여덟 가지 즐거움)이라 한 데는 까닭이 있다고 한다. 맹호도강(猛虎渡江), 원포귀범(遠浦歸帆), 평사낙안(平沙落雁) 등은 다른 데서도 쉽사리 볼 수 있지만 나머지 다섯은 그렇지 않다. 앞뜰의 회화나무 전정괴수(前庭槐樹), 뒤뜰의 오죽 후원오죽(後園烏竹), 서쪽 들판의 누른 보리 서교황맥(西郊黃麥), 북쪽 연못 붉은 연꽃 북지홍련(北池紅蓮), 거슬러 오르는 십리 물길 역수십리(逆水十里)다. 재구성해 보면 이렇다. '팔락정 앞과 뒤에 회화나무와 까만 대나무가 들어서 있고 여기서 바라보는 낙동강 있는 서쪽 들판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간다. 북쪽 연못에는 홍련이 피어 있고 (낙동강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건만) 마을 앞 시냇물은 남에서 북으로 십리를 역류하네.' 지금도 언덕배기 팔락정에 서면 비슷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다만 낙동강 제방이 너무 높게 쌓였고 홍련이 피던 북지는 아무래도 들판 개간하는 데 들어갔지 싶을 뿐이다.

미구마을 물줄기는 가항마을 앞을 지나 토평천까지 이어진다. 가항마을은 말하자면 이 두 가지 물줄기에 둘러싸인 형상이다. 한강 정구 시절에는 낙동강이 역류하면 토평천이 마을로 범람해 들어오곤 했다. 마을 야산 목덜미(項)가 꺼져 있었기 때문인데 여기를 한강 정구가 돋우게(加) 했다. 그런 뒤로는 수해가 사라져 집과 논밭이 두루 안전해졌는데 이 때문에 마을 이름이 가항(加項)이 되었다. 조선 시대 토목 건축 가운데 지금까지 그 내력이 전해져 오는 드문 사례다.

이런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우포늪도 지금 우리한테 으뜸 쓰임새는 위안이고 위로다. 날로 심해지는 경쟁에 몸도 지치고 마음도 다친 사람들은 우포늪에 스며들어 몸을 추스르고 마음을 어루만진다. 무엇보다 우포늪이 아름답고 다채롭기 때문일 것이고 그런 우포늪이 사람과 동떨어져 있지 않고 함께하는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과 더불어 어우러지는 습지는 이제 우리나라에 그다지 흔치 않게 되었다. 바닷가 갯벌을 빼고 내륙습지로는 우포늪이 거의 유일하지 싶다.

주관 :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

문의 : 환경교육팀 055-533-9540, gref2008@hanmail.net

수행 :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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