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이 던진 가장 묵직한 표어는 '저녁이 있는 삶'이 아닐까 싶다.

직장인으로 가정해보자. 고된 업무를 마치고 지하철이나 버스에 몸을 싣고 집으로 향하는 길. 이미 저녁밥을 먹을 시간은 훌쩍 지났다.

해가 짧은 계절이라면 창문 밖 풍경은 이미 빛을 잃었겠다. 해가 긴 계절이라면 붉은 노을에 시선을 빼앗겨 생각에 젖은 시간이겠다.

그 생각이란 과연 긍정의 방향으로 흐르는 모습일까. 소중한 누군가가 그리울 것이고, 스스로 자신을 애처롭다 여길 것이고, 그 생각은 고스란히 부정의 형태로 응축할 것이다.

켜켜이 쌓인 부정은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말 한마디에 위로를 받았다. 그저 말뿐인, 투명에 가까운 외침이었음에도 그 울림은 각자에게서 뚜렷했다.

'그저 따뜻한 밥 한 끼가 먹고 싶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고 싶다'는 소망. 차창 밖으로 보았던 슬픈 풍경은, 저녁이 있는 삶 속에서 따뜻한 빛을 얻는다.

한 정치인이 던진 화두는, 그가 기세를 잃은 지금에도 유효하다. '저녁이 있는 삶'은 한 정치인의 구호가 아니라, 모두의 바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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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에 있어야 할 관객은, 전시장을 찾아야 할 관람객은 지금도 '여유'가 없어 문화와 예술을 즐기지 못한다고 말한다.

문화 콘텐츠를 양산하고, 예술을 해야 할 문화예술인은 숨통을 조이는 서류 더미에, 달력을 빽빽하게 채운 규정된 작품 창작과 공연 횟수에, 정치적 잣대에 휘둘리고 있다.

문화는 먹고사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누군가에게는 밥줄이고, 또한 누군가에게는 시간 외 노동이 없는 삶이다. '저녁이 있는 삶'이 곧 '문화가 있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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