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얻은 사람 숨겨진 사람과 같아
타인에게 해 끼치지 않는 삶 살아야

도(道)의 사전적 의미는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종교적으로는 깊이 깨친 이치나 경지', '무술이나 기예 따위를 행하는 방법'이라고 나와 있다. 국어의 사전적 해석이 너무 간략해 마치 편의점에 진열된 인스턴트식품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도교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생성된 상형문자 '道'의 의미는 단순하지도 간결하지도 않다. 머리 수(首)+책받침()으로 이뤄진 道에서 '책받침'은 '십자로+발(足)'의 형상을 합한 의미라 하니 길을 가리키는 도는 여러 갈래의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머리로 고뇌하는 인간의 형상을 그린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상형문자의 의미야 어떻든 중국에서 도는 수천 년 전부터 최고의 선(善), 무상(無上)의 진리로 자리 잡았다. 물론 노자와 장자의 역할이 지대했으나 도라는 무형의 가치가 중국의 정신사상에 중요한 본류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도가에서 말하는 도가 우주적 범주를 지닌 것이라면 공자로 대표되는 유가의 도는 인간의 도리를 앞세운 인륜의 범주를 지닌 것이었다.

노자와 장자가 도에서 만물이 이뤄지고 그것이 운용되는 과정에 관심을 보이면서 초월지(超越智)를 이상적인 것으로 제시한 반면 공자는 도가 인간에 의해 창조되고 이뤄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사람이 길을 넓힐 수 있지 길이 사람을 넓힐 수 있는 것은 아니다(人能弘道非道弘人)"라고 가르쳤다. 주희(朱熹)는 "도란 모든 사물의 당연한 이치(事物當然之理)를 이름이요 사람들이 공통으로 말미암아 할 길이다"라고 주석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도(道)를 얻은 사람은 막힘없이 행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행함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의 온화함과 부드러움을 스스로 알아낸다. 그는 부(富)를 위해 다투지도 않으며 청빈한 미덕을 구하지도 않는다. 또한 그는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그의 길을 행하며 그러면서도 홀로 서서 걸어감을 자랑하지 않는다. 특히 도를 얻은 사람은 숨겨진 사람처럼 그대로 있다. 완전한 덕이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는 것처럼 무자아(無自我)는 참된 자아다. 가장 위대한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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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S.오쇼 라즈니쉬는 <'살아있는 것에 대해 명상하라>에서 사랑은 싸움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사랑은 싸움이 끝난 후에도 살아남지만 사랑은 싸움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삶 또한 이와 같다. 삶을 알려고 하면 그대는 혼란이 일 것이다. 깨달음에 대해서는 모두 다 잊어버려라. 단지 삶을 살라. 그러면 그대는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깨달음이란 지적인 것도 이론적인 것도 아니며 깨달음이란 전체적인 것이다. 깨달음은 언어적인 것도 아니고 비언어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이 우리가 삶이 신비롭다고 말하는 의미이다. 삶을 살 수는 있지만 해답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도를 행하는 사람은 장애물이 없다. 자신의 행동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신의 온화함과 부드러움을 알지 못한다. 장자의 이해를 통해 초월적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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