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채민 기자의 '마르디 히말' 트레킹] (3) 히말라야의 사람들
산 넘고 물 건너 도서관 찾는 아이, 작은 나눔의 참된 가치 일깨워
고개 까딱하는 표현·아찔한 운전, 부족한 깜냥 돌아보는 계기로
마트 주인·가이드·술꾼 아저씨 문화 뛰어넘는 '삶'여행의 의미

히말라야 트레킹을 마치고 포카라에서 '탄센'으로 이동하려고 택시를 탔다.

6∼7시간이 걸리는 대장정(?)을 앞두고, 택시 기사에게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를 담아 음료수를 건넸다. 현지인 택시 기사는 첫인상 자체도 과묵하기 그지없었는데, 음료수를 건네자 고개를 좌우로 '까딱'하고 흔드는 게 아닌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말이 통하지 않으니 딴에는 '내가 뭘 잘못했나?', '나의 호의가 저 양반한테는 왜 결례로 받아들여진 걸까?' 등의 생각만 할 수밖에 없었다.

네팔 제2의 도시라는 포카라에서 '탄센'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현지인들에게는 일종의 '고속도로'였던 셈인데, 구불구불한 산길을 쉴 새 없이 덜컹거리며 가야 했다. 군데군데 비포장 길이 나타나고 길은 좁기 그지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택시 기사가 펼치는 아찔한 곡예운전은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했다.

탄센 도착 후 약속돼 있던 한국인 지인을 만났고, 그에게 택시 기사의 불친절함을 호소했더니, 이런 말이 돌아왔다. "네팔 사람들은 좌우로 고개를 까딱하는 게 긍정의 표시예요."

탄센 전경

뭔가 석연치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자주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려온 나로서는 네팔 택시 기사의 고갯짓을 탐탁지 않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긍정의 표현이었다니! 먼 길을 묵묵하게 운전해온 택시 기사에게 제대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지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의 곡예운전 역시 이곳에서는 '일상 다반사'라는 점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히말라야가 선사하는 압도적인 풍경 외에도, 다양한 히말라야 사람들은 나에게 순간순간 충격을 주었다. 물론 그것이 여행의 재미이기도 하거니와, 낯선 즐거움이었던 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부족한 깜냥으로 모든 사물을 재단해온 '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히말라야의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낯선 나'였고,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본래의 나'이기도 했다.

'싯다르타'의 탄생지로 잘 알려진 '룸비니'와 가까운 곳에 있는 '탄센'은 한때 팔파 왕국의 수도였다. 팔파 왕국은 15∼16세기경 '중앙 네팔' 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한때 인도 북부 지역까지 그 영역을 넓힌 적도 있으나 19세기 초 네팔왕국(카트만두)에 합병된다. 해발 1350m에 자리를 잡은 탄센의 현재 인구는 2만∼3만 명 정도이며, 거주민 대부분은 무직이다.

탄센의 중심도로. 15~16세기 네팔 중부를 호령했던 팔파 왕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우리나라 읍내 같은 도심이 형성돼 있고 '싯다르타 고속도로'가 인접해 있어 사람들의 왕래도 잦은 편이긴 하지만, 딱히 산업이라 할 만한 게 없었다.

이 때문에 카트만두 같은 대도시나 인도 북부의 산업도시로 일거리를 찾아 떠나거나, 아예 농촌으로 이사 가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이번 여행 기간에 탄센을 찾게 된 건, 지인이 책임자로 있는 어린이 도서관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국제 기독교 단체가 운영하는 이 '어린이 도서관'은 일종의 방과 후 학교처럼 운영되는 곳이었는데,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찾아오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단체가 네팔 현지에 어린이 도서관이나 학교를 지어주는 운동을 펼치는 데 대해 썩 좋은 인상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다소 편협한 생각일 수는 있으나, 대한민국 구석구석에도 소외받는 어린이가 많을 뿐 아니라 각종 사회적 모순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파괴되는 사례가 속출하는데 '국제봉사'라는 미명이 지금 이 순간에도 발생하는 불가항력적인 한국의 아픔을 지워버리는 효과를 일정 정도 발휘한다고 봐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나 대기업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원조가 차후에 얼마나 손쉽게 여러 가지 변주된 형태의 제국주의라는 옷으로 갈아입어 왔는지를 익혀 봐왔던 터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루 2∼3시간씩을 걸어 산 넘고 물 건너 어린이도서관을 찾아오는 아이들의 삶 속에서는 나의 이런 생각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세계와 함께 호흡할 수 없게 만드는 거대한 빈곤의 벽은 감히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고, 인도주의적 국제 봉사가 자국의 사회·문화적 피폐함을 해소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는 걸 인정한다.

탄센에서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낸 우리는 '어린이 도서관'에 작은 금액이나마 기부를 했고, 그 돈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한 아이의 교육비가 된다는 말에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충만감을 난생처음으로 맛봤다.

'이게 뭐지?' 고개를 까딱까딱 갸웃거려야 했다. 물론 그 갸웃거림은 긍정과 감사의 의미였다.

'네팔 공화국' 최초의 지방선거가 지난 5월 14일 치러졌다. 우리가 네팔에 머물렀을 때는 4월 초·중순이었고, 카트만두 시내 곳곳에서는 네팔 당국이 내붙인 선거 안내 포스터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었다.

카트만두의 한 가정에서 만난 동네 아저씨(?)들. 말은 안통했지만 무척이나 즐거웠던 술자리였다.

또한 공교롭게도 이때 카트만두 전역은 거대한 공사판이었다. 안 그래도 분지인 탓에 자동차 매연 등으로 말미암아 나쁜 공기로 악명높은 카트만두인데, 여기에 더해 공사 때문에 먼지까지 자욱했으니 죽을 맛이었다.

한 현지인은 카트만두가 공사판이 된 이유에 대해 국제 원조 기금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탓일 수도 있고, 곧 있을 선거를 염두에 둔 집권당의 선심성 정책일 수도 있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아무튼, 네팔 정국을 잘 알지 못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던 차에 운 좋게 카트만두에서 기초의원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현지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는 원조가 3억 원 들어오면 2억 원 떼먹고 1억 원으로 공사를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안 하겠다. 3억 원을 다 투입해서 동네를 살기 좋게 만들고 싶다."

여느 국가와 마찬가지로 위정자와 관리의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시민 움직임 역시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내가 만난 네팔인들은 어떤 피안의 세계에 사는 듯한 느낌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것이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한 낯섦 때문이라 해도 할 말은 없지만…….

10여 년 전 함양의 어느 농공단지에서 일했다는 탄센의 슈퍼마켓 주인, 한국에 일하러 가기를 갈망하며 한국어 능력 시험 준비를 하는 외국계 레스토랑의 점원, 한국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작은 한국식당을 운영하며 트레킹 가이드로도 일하는 두 아이의 아버지 '빠샹', 술잔을 주고받았던 카트만두의 '동네 술꾼 아저씨들', 쟁기질하며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던 농부, 잠시 잠깐이었지만 그들과 조우하지 않았다면, 히말라야는 그저 높은 산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초월과 현실의 경계에 대해 생각하며 짧지만 타임머신을 탄 듯한 긴 여행을 마쳤고, 한국에 돌아온 후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는 걸 담담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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