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익숙하게, 아늑한 문득 '동네 한 바퀴'

바쁜 일상 속 산책할 여유도 없는 당신을 대신해 걷습니다. 동네, 골목, 철길, 둘레길, 해안선…. 걸을 수 있는 곳은 다 걸어보겠습니다. 경남 어디든 천천히 걷기 좋은 곳을 찾아갑니다. 자세히 둘러보고, 꼼꼼하게 소개하겠습니다. 만보기를 켜고 거리와 걸음 수도 기록하겠습니다. 잠깐 여유를 찾아 산책과 사색을 즐기려고 마음먹었다면 안내서로 사용해주세요.

창원시 의창구 의창동

집에서 나서는 순간부터 산책을 시작한다. 지난 2000년부터 지금까지 내가 사는 동네, 창원시 의창구 의창동이다.

'우연한 산책'이라는 의미에서는 선택지로 더할 나위 없다.

300m 가까이 걷자 아파트 단지가 나온다. 지난 2002년 9월 인근 도계동으로 교사를 옮기기 전까지 창원중·고등학교가 있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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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 넘어 보이는 김종영 생가와 아파트 단지. / 최환석 기자

두 학교는 운동장을 가운데 두고 마주했다. 운동장, 매점 등 시설은 함께 썼다. 덩치 크고 나이 많다는 이유로 고등학생들이 점령하다시피 했다. 중학생들은 눈치껏 매점을 드나들고, 운동장 한쪽에서 공을 차곤 했다.

야외 화장실이 각각 한 곳씩 있었는데, '푸세식'이었다. 교내 이발소도 있었는데, 요즘은 웬만해선 찾아보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근현대사 박물관 같은 느낌이랄까.

창원중학교 건물 뒤로 기찻길이 있었다. 기차는 시간을 칼같이 지킨다. 그래서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듣기평가를 할 때면 어김없이 같은 시간, 같은 문항에서 기차가 지나갔다. 그땐 모두 문제 풀기를 포기해야만 했다. 공부 꽤 한다는 친구들은 매번 울상이었다. 도인처럼 너털웃음을 짓는 친구도 있었다. 지금은 기차가 만들어준 그 여유가 그리울 때가 있다.

기찻길을 사이에 두고는 옛 경남여자상업고등학교가 있었다. 경남여상은 봉곡동으로 옮겨 현재는 경남관광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옛 학교 터는 주민 여가생활 공간인 '의창 스포츠파크'로 변했다. 체육관 건물은 그대로 남아 주민 체육관 등으로 쓰인다.

학교 세 곳이 이전하면서 주변 풍경도 많이 변했다. 등·하교 시간이나 점심때면 학교 주변은 학생들로 가득했다. 다들 두 손 가득 군것질을 들고 수다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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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책길에서 만난 풍경. 기찻길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단서. / 최환석 기자

골목 여기저기에선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곤 했다. 선생님이 골목을 급습하면, 학생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문방구니, 서점이니, 분식집이니 죄다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그나마 창원초등학교가 오랜 시간 터줏대감처럼 동네를 지키고 있다. 지난 1907년 창흥학교로 개교했으니, 올해로 110년이다. 이 동네 출신 친구들은 창원유치원, 창원초등학교, 창원고등학교를 거치길 선호했다. 창원대학교까지 가게 되면 학력이 죄다 '창원'으로 통일된다. 다들 창원이라는 이름에 자부심이 컸다.

창원초등학교에서 창원향교 방향으로 향한다. 중간 지점에 '북동샘'이 나온다. 옛 창원읍성에는 동헌 앞에 우샘, 향교 옆에 좌샘, 객사 앞에 북동샘, 남산 앞에 대밭샘이 있었다고 한다. 학교 확장, 철로 가설, 아파트 건축으로 세 샘이 사라지고 현재는 북동샘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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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향교. / 최환석 기자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수질이 좋아 부임하는 부사마다 감탄했다는 북동샘은 주변 지형보다 낮은 곳에 있어 안내판이 없으면 그냥 지나칠 듯하다.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려는 까닭인지, 우물 안을 철망으로 가려놨다.

이번엔 창원향교를 방문한다. 고려 충렬왕 2년(1276년) 세웠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1705년 조선 숙종 31년에는 청룡산 아래, 현 마산회원구 합성동에 자리했다고.

하지만 '무를 숭상할 땅이지, 문을 숭상할 땅은 아니다'는 지적에 1748년 영조 24년에 다시 의창동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향교는 교육과 제례 공간으로 나뉜다. 유생이 수학하는 명륜당과 기거하는 동·서재, 공자 등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과 동·서무로 역할을 구분한다.

교육공간은 앞쪽에, 제례 공간은 뒤쪽에 있는 전형적인 향교 배치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양식이다. 향교 정면 풍화루는 아래층이 출입문 역할이다. 위층은 유생 여가와 여름철 학습공간, 손님 접대공간으로 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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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영 생가 가까이 있는 현대식 건물. 외벽에 김종영 작품을 반영했다. / 최환석 기자

풍화루 가까이 느티나무 한 그루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수령 200년을 넘긴 '신목'이다. 안내판에 '가지를 꺾는 자는 신의 벌을 받는다 하여 수호신으로 추앙했다고 전해짐'이라 쓰여있다.

어릴 때는 향교라는 이름이 뿜어내는 무게에 섣불리 안을 들여다볼 생각을 못 했다. 주눅이 들었다. 지금 늦게나마 둘러보니, 참 다소곳하고 따뜻한 느낌이다.

이어진 발걸음은 조각가 김종영 생가에서 머무른다. 김종영은 일본 동경미술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 미대 교수로 지냈다. 1953년 런던 국제조각대회 출품을 시작으로 여러 국제전에 참가했다.

그의 작품특성은 생가 앞에 놓인 '작품 78-28'로 엿볼 수 있다. 인간 얼굴을 표현한 추상조각이다. 고즈넉한 생가 옆에 현대식 건물이 있는데, 외벽에 김종영 작품을 반영했다. '한국 현대 추상조각의 거장'이라는 수식어를 뺐다면 더 운치 있었을 듯하다.

이 고택이 김종영 생가라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학창 시절 김종영 생가 옆에서 친구들과 곧잘 어울렸는데도 말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실감 난다.

그러니 오늘은 내가 사는 동네 산책을 추천한다. 가까운 곳에 우연한 만남이 있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걷는 산책, 말만 들어도 즐겁지 않나.

이날 걸은 거리 3㎞. 4279보.

창원시 마산합포구 일원

마산상업고등학교, 지금은 마산용마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꾼 학교 담벼락을 따라 걷다가 어느 흉상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1943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1960년 옛 마산상고에 입학한 김주열 열사의 흉상. 그는 고등학교에 들어간 그해 3월 15일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를 목도한다.

민중은 모두 들불처럼 일어나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김주열 또한 성난 군중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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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신미술관에서 마산만 방향으로 바라본 시선. / 최환석 기자

타는 목마름으로, 뜨거운 가슴으로 민주주의 안녕을 누구보다 바랐을 그는 끝내 마산 앞바다에 시신으로 떠오른다.

주검은 비록 차가웠을지라도, 그의 염원은 도화선이 되어 4·19혁명을 이끈다. 열사의 흉상 앞에서 잠시 묵념을 한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용마고 정문에서 우회전을 한다. 좁은 골목을 따라 나 있는 길 끝에 다다른다.

4층짜리 빌라 건물 뒤로 있는 듯, 없는 듯 방치된 집 하나가 보인다. 일명 '지하련 주택'이다.

소설가 지하련(본명 이숙희·1912~?)은 일제 말기와 해방기로 이어지는 1940년대, 당시 삶을 글로써 충실하게 써냈던 여성 작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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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열 열사 흉상. / 최환석 기자

1940년 요양을 이유로 셋째 오빠 이상조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지상 2층 목조 가옥으로 거처를 옮긴다.

일본식 시멘트 기와지붕 양식이 돋보이는 이 건물은 지난 2015년 한 차례 화재를 겪었다. 당시 살고 있던 이들은 떠났고, 집만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하련 주택에는 아마도 시인 임화(1908~1953)가 드나들었을 것이다. 지하련과 임화는 물 좋고 공기 좋았던 마산에서 우연히 만난다.

지난 1935년 폐결핵 치료를 이유로 임화가 먼저 마산에 내려와 있었다. 뒤를 이어 지하련이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마산에서 지하련은 임화의 두 번째 아내가 된다.

둘의 만남이 이뤄진 당시에는 이곳 주택에서 마산만이 곧장 보였으리라.

문득, 그런 상상을 하며 고개를 돌린다. 아쉽게도 지금의 마산만은 현대식 건물 숲에 가려 파편화한 모습이다. 물 좋고 공기 좋다는 말 또한 옛말이다.

지하련과 임화의 신혼집이 있었던 터를 지나 인적 드문 골목길을 벗어나면 중성동이다.

이곳 인도 위에 검은 비석이 하나 있다. 지나는 이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 외로운 비석은 '허당 명도석 독립지사 생가터'를 알리는 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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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련 주택 모습. / 최환석 기자

허당 명도석(1885~1954)은 이름 앞에 호와 더불어 독립운동가·사회사업가·교육자·언론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비석은 또한 그를 이렇게 설명한다.

1902년 구강장 상권투쟁을 비롯하여 조선물산장려운동, 마산노동야학교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 기미 만세시위 주도, 원동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독립자금을 해외로 송금, 백산 안희재·남저 이우식 등 동지들과 연합하여 자금을 국내외로 제공. 의열단 경남조직 주재, 밀양 폭탄 사건 주도, 동아일보 창간 주주로서 민족계도 사업에 참여, 신간회 결성과 지회장 활동, 만주에서의 거사 모의 발각으로 평양감옥에서 옥고, 건국준비위원회 마산 지회장 등 1945년 해방될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중성동 64-2번지에서 출생, 서거하였음. 2006년 9월 마산문화원 세움.

비탈길이 이어진다. 멀리 창원시립마산박물관과 문신미술관이 보인다. 추산동이다.

박물관·미술관 근처에 또 하나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허당 명도석 생가터 비석에 비해 많은 정보를 담고 있지 않다. '추산정 터'라는 이름과 '추산동 41-6번지 일대'라는 공간 설명, 그리고 '이곳은 대략 250~300년 전에 세워진 추산정이 있던 자리이다'는 한 줄 설명이 전부다.

추산정이 있던 자리, 추산은 고목이 우거져 있던 곳이라 전해진다. 공기는 맑고 서늘했기에 마산 사람들이 곧잘 찾아 더위를 식히고 여가를 즐기던 곳이었다.

또한, 지역 문화공간 역할도 했다. 시인들은 이곳에서 시를 음미했고, 활쏘기·백일장·그네뛰기 행사가 이어졌다. 1960년에는 독재 타도를 외치는 학생들이 모였던 장소이기도 했다.

추산정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 마산에서는 추산정이 운동의 시작점 역할을 했다. 김용환은 3월 3일 추산정에서 고종 국장 참관을 목적으로 모인 군중에 독립선언서를 나눠준다. 이어 추산정에 모인 지역 인사들은 이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해 3월 10일에 있었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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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산정이 있었다는 사실만 알리는 비석 하나./최환석 기자

일제강점기에는 시국강연회와 더불어 각종 민족운동 모임이 있었던 공간이 바로 추산정이었다. 지금은 빛바랜 사진 속에서만 추산정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비석 곳곳 공간이 야속하기만 하다. '추산정이 있던 자리'라는 한 줄 설명으로는 그 무엇도 연상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문신미술관 건물 앞에서 시원한 해풍을 맞으며 마산만을 바라본다. 김주열이 차갑게 떠오른 바다,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민중의 뜨거운 함성이 울려 퍼졌던 그 바다. 지금은 우뚝 솟은 건물에 시선을 뺏기는 슬픈 바다다.

이날 걸은 거리 2.5㎞. 3935보. 독자와 함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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