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봄이면 꽃으로 치장하고 가을에는 단풍이 울긋불긋 아름다워 산방산(山芳山)이라 한다. 전설에는 고승과 함께 수행하던 노루가 환생하여 다시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아 큰스님이 되어 이곳에서 수행하고 있었단다. 마침 길 잃은 여인으로 찾아와 유혹하는 보살의 시험에 들지 않아 득도를 하자 온 산에 꽃비가 내려 산방산이 되었단다.

거제 해금강이 남부면 갈곶이라면 이곳 산방산은 거제 내금강이다. 산자락에 펼쳐진 비원에서 기화요초와 연초록의 향연을 즐기고 산을 오른다. 거의가 토산인 거제에서 기암괴석의 암봉을 만날 수 있는 산이다. 정상에 오르니 남녘 바다의 물비늘이 금빛으로 반짝이고 발아래 네 번째 옥녀봉이 문필봉 형상에 치맛자락을 펼치고 앉았다.

건너편 우두봉 중허리엔 쫓겨난 황제의 한이 서린 성벽이 천년 세월을 두르고 있다. 폐왕성이라고도 불리는 둔덕기성이다. 성은 언제부터 쌓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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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 내금강 산방산. / 박보근 노동자

옛날하고도 옛날 중국 절강성 천태산 산신령이 동쪽 바다를 보니 섬사람들이 해적들 노략질에 피할 곳도 없이 오롯이 당하고만 살 거든. 그래 마고할미를 불러 섬사람들이 해적에 맞서다 당하지 못하면 양식과 재물을 가지고 들어가 지킬 수 있는 성을 쌓아주고 오라 했단다. 마고할미가 서해 바다를 펄쩍 뛰어 건너와서는 성을 쌓을만한 돌을 찾아 이리저리 살펴보니 괭이바다 괭이섬에 집채 같은 돌들이 지천인 거라. 치맛자락에다 한가득 돌을 담아 와서는 우두봉 중허리에다 하룻밤 사이에 뚝딱 성을 쌓아버렸대. 그런데 산꼭대기 성안에서 싸우는데 물이 없으면 버틸 수가 없잖아? 마고할미가 성 가운데 흙을 파고 팔을 쑤욱 집어넣으니 괭이바다물이 솟구쳐 오르는데 짜지가 않아. 참 신기하기도 하지. 어제까지도 그 우물에 명주실 꾸리를 풀어 넣으면 명주실이 괭이바다로 나온대나 어쩐대나 그래. 성을 쌓고도 돌이 남아 우두봉 골짜기에 쏟아붓고 나니 새벽이 되더란다. 밤새 일한 마고할미 그제야 소피가 마려워 우두봉 골짜기에다 오줌 누고 서해 바다 펄쩍 뛰어 돌아갔단다.

둔덕면 거림리에서 폐왕성을 오르다 보면 골짜기에 검은색 돌무더기 너덜겅이 나오는데 이것이 마고할미가 남은 돌을 버린 곳이란다. 돌 너덜겅 아래로 물 흐르는 소리는 마고할미 오줌이 아직도 흘러가는 소리란다. 그래서 바닷물이 짜다는 뭐 그런 이야기래. 이 둔덕기성이 폐왕성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데는 황제국 고려 의종에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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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왕성에서 본 둔덕. / 박보근 노동자

황제의 동생인 대령후 경은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인망이 두터워 모후인 공예태후가 늘 곁에 두고 아끼는 황자였다. 놀기 좋아하고 방탕한 황제보다 성군이 될 재목이었으나 장자를 황태자로 세워야 한다는 적장자 법통이 자리 잡던 터라 모후의 후원이 있었음에도 황위에서 밀려나 있었다.

걸출한 아우를 둔 황제는 불안했다. 대령후가 부담스러워 정사에 관여하는 것을 꺼려하고 또한 그와 교유하는 신료들과 황족을 감시했다. 정서(鄭敍)는 이자겸과 묘청의 난을 진압한 아버지 덕분에 음서로 조정에 나온 인물이다. 문장이 뛰어나 선황 인종의 눈에 들어 공예황후 동생 임 씨와 혼인하여 외척이 되었고 벼슬이 내시낭중에 이르렀다. 부황 인종의 고명대신 정습명이 황제가 정사를 돌보지 않고 방탕함을 질책하여 나무라자 의종의 신임을 얻은 정서와 김존중은 함께 모의하여 그를 실각시켜 버린다.

권력을 쥔 김존중에게 이제 남은 최대의 정적은 어제의 동지였던 정서였다. 황제의 이모부로 외척이니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토사구팽 할 수 있었다. 김존중은 선수를 쳤다. 황제가 껄끄러워하는 동생 대령후 경을 끌어들였다. 왕정 체제에서 가장 큰 죄는 친인척의 반역이다. 똑같은 처조카 입장이라 대령후와도 친밀하게 지내는 정서가 내심 불만이던 차에 김존중과 환관 정함이 참소하였다. 정서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몰래 대령후 왕경의 집에 모여 술잔치를 벌이며 뭔가를 모의하는듯하다 고변하자 정서와 양벽, 김의련, 김참 등을 유배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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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왕성. / 박보근 노동자

그러나 정작 대령후는 모후의 눈치를 보느라 몇 년이 지나서야 그의 사무 관청인 대령부를 폐하고 천안으로 귀양살이를 가게 한다. 정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더라고 덥석 끌려가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하고 매를 내리니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국문을 받으며 자초지종을 알고 나서는 억울함을 하소연했으나 이미 끈 떨어진 망석중이었다. 곤장을 맞고 본향인 동래로 부처되었다. 오래지 않아 잠잠해지거든 다시 부르겠노라 한 황제의 약조를 이제나저제나 6년을 기다리던 어느 날, 개경에서 사람이 왔다는 소식에 버선발로 맞았는데 부르기는커녕 거제로 유배 처소를 옮기라는 칙령이었다. 동래는 정서의 본향이라 그나마 자유롭고 편한 유배 생활을 보냈는데, 낯설고 물 설은 거제에서는 곤궁하기가 짝이 없었다.

 동래에서 6년을 포함한 19년째 바람이 스산한 어느 가을, 유배처인 지금의 사등면 오양역과 가까운 견내량에 나와 늘 그랬듯 뭍을 바라보며 황제의 부름을 기다리던 정서는 수백의 인마가 견내량을 건너서 섬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이럴 수가 오매불망 20년을 그리던 임이었다. 사신을 보낸 것도 아니고 황제가 친히 이 변방의 유배지를 찾으시다니 정서는 감읍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정작 고개를 떨구고 서러운 울음을 쏟아낸 이는 황제였다. 이고, 이의방, 정중부 등 무신들의 쿠데타로 거제도에 폐출되어 왔던 것이었다. 유배를 왔지만 한 나라의 황제였던 몸이라 함께 수행한 인원과 물자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애첩 무비까지 데리고 왔다 하니 말이다. 둔덕기성을 처소로 정하고 보수하느라 오양역에 머무르는 동안 황제에게 정서는 20년 동안 쌓인 그리움과 원망을 쏟아냈을 것이다.

내 님을 그리워하며 울고 지내니

산접동새와 나는 비슷하여이다

아니라 하시며 잘못되었다 하신들 아으

지는 달과 새벽 별은 알으시리이다

넋이라도 님과 함께 지내고 싶어라

우기시던 이가 누구십니까

잘못도 허물도 전혀 없습니다

말을 하지 마시지요

슬프구나 아으

님이 나를 하마 잊으셨습니까

아서라 님이시어 도로 들으시어 사랑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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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내량 끝에 펼쳐진 한산대첩지. / 박보근 노동자

유배가 풀린 정서가 돌아가고 난 얼마 후 개경에서 이의민이 황제를 찾아 둔덕기성으로 왔다. 하급 장교 시절 무비에게 반해 구애를 했으나 황궁을 차지한 자라야만 저를 차지할 수 있다며 매몰차게 거절당했던 이의방이 황궁의 주인 노릇을 하게 되자 이의민을 시켜 무비를 개경으로 데리고 오라 시킨 것이었다.

눈앞에서 무비를 빼앗긴 의종의 어금니에 자갈돌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폐주는 둔덕기성을 증축 보수하며 둔전을 경작하여 상둔, 하둔을 두고 양병하면서 어구에 무기를 만들어 보관하였다. 날마다 성루에 올라 견내량 너머 뭍을 바라보며 와신상담했으리라. 때마침 김보당이 복위의 명분을 내걸고 군사를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경주로 나가 무신 정권과 맞섰으나 패하여 곤원사 연못가에서 이의민에게 등뼈가 꺾여 수장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황제가 올랐던 성루 터에서 바라보니 건너 뭍이 손에 잡힐 듯 지척이다. 황제가 거제 섬을 들어설 때 견내량은 '갯내' 즉 시냇물처럼 빠르고 거칠게 흐르는 바다였지만 이곳에서는 눈앞에 두고도 건너지 못하는 물길이었다. 황제는 다 보이는(見乃) 물길 너머 북쪽 하늘 아래 이의방에게 안겨 있을 무비를 떠올리며 치를 떨었으리라.

몸을 돌려 뒤돌아보니 황제가 둔전을 두어 내일을 기약했던 산방산 아래 펼쳐진 들판에 모심기 준비가 한창이다. 그나마 팽개치지 않고 일구고 있으니 다행이다. 칠백 리 갯길 길놀이를 나선 곳에서 세월이 너울지는 봉놋방에 들어 괴나리봇짐을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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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내량 끝에 펼쳐진 한산대첩지. / 박보근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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