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은 충남 한산 사람인 김효정과 중매결혼을 했다. 처음 처가에서는 이 결혼을 반대했다. 무골형인 장인 김현성은 사위도 자신처럼 건장한 몸집에 호탕하기를 바랐으나 류영모는 체구가 작고 깐깐한 선비형이었다. 장모 또한 사위가 서울 사람인데도 앞으로 시골 가서 농사를 짓겠다는 얘길 듣고 귀한 딸을 주기 싫어했던 것이다.

영모는 이를 무릅쓰고 혼인을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사윗감의 문장과 글씨에 놀란 장인이 그제서야 이를 허락했다고 한다.

혼례는 1915년 음력 9월 서울 당주동 신랑 집 마루에서 올렸다. 그런데 신랑은 주례사 가운데 들어간 성경 구절을 미리 정해주었다. 바울의 편지인 고린도 전서 7장 1절~6절이었다.

"남자는 여자와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음행이 성행하고 있으니 남자는 각각 자기 아내를 갖고 여자는 각각 자기 남편을 갖도록 하십시오. … 아내는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직 남편에게 맡겨야 하며, 남편 또한 오직 아내에게 맡겨야 합니다."

본능의 뿌리는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내는' 그 뿌리처럼 깊다. 그런데 그 본능으로는 부족하여 욕망이 더해지게 되면 필경 사달이 나게 된다. 본래 중생계의 모든 것들은 본능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면서 지나침이 없기 때문에 균형 관계가 유지된다. 그중 인간만이 별난 존재로 그렇지 못하다.

부처는 중생의 종류를 '알로 생기는 것', '태로 생기는 것', '습(濕)으로 생기는 것', '화(化)하여 생기는 것' … '생각이 없는 무정물(無情物)' 등등을 총칭했다. 다른 중생은 욕망이 끼어들지 않아 그 세계가 그대로인데 태생(胎生) 가운데 유독 인간만이 고질적 욕망을 일으켜 그로 인한 고통을 되돌려 받는 것이다. 여타 생명은 색정(色情) 때문에 암컷과 수컷이 서로 수작하게 되지만 이 또한 남자와 여자 사이에 들면 치정(癡情)으로 발전하기 일쑤다.

다석이 존경했던 간디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렇다. 젊은 시절 간디는 부모가 임종하는 그 순간에도 음욕(淫慾)을 버리지 못했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고백했다. '마하트마(大聖)'라는 칭호를 받은 현자도 그런 적이 있었으니 더 말할 게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남녀는 서로 관계를 멀리하는 것이 좋다고 한 것이다.

엄정(嚴正)함을 타고난 다석이기에 결혼 주례사에 고린도에서 보낸 편지글을 넣어 스스로를 경계했다. 결국 쉰 살을 넘어 부인과 한집에 살면서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 해혼(解婚)을 할 수 있었다.

혼례식을 올린 유명모는 그길로 목포행 기차를 타고 처가로 향했다. 그때까지 신부의 부모님을 뵙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처가 사람들은 스물두 살이 되도록 고이 기른 맏딸을 시집보내고 쓰린 가슴을 달래던 중, 첫날밤 저녁에 새신랑이 천 리나 떨어진 처갓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놀라움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장인 장모께 인사를 드리기 전에 신방에 들어갈 수 없어서 이렇게 왔다"는 말에 장인 장모는 눈시울을 붉히며 감격했다고 한다.

다석이 결혼하고 4년 뒤인 1919년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남강 이승훈이 유영모를 만난 얘기다.

남강은 1910년 유영모를 오산학교 과학교사로 초빙하기 위해 서울에 왔을 때 영모의 아버지 유명근과 처음 만났다. 서로가 자수성가한 이들이어서 남다른 우정을 나누었다. 남강은 그 후 3·1운동 준비로 서울에 드나들면서 꼭 유명근, 유영모 부자를 찾았다.

"남강 선생은 3월 1일 우리 집에 들러 아침을 잡수시고 기독교에서 모금한 자금 6000원을 나한테 맡기시며 '나를 따라다니는 일본 형사가 많으니 자네가 좀 맡아 두게' 하시며 분주히 나가셨어요. 나도 어쩔 수 없어 그 돈을 종로에서 피혁 상점을 하던 아버지 금고에 넣어두면서 아버지께 돈의 출처를 밝히지 않아 아버지도 무슨 돈인지 모르셨어요. 그런데 그해 6월에 일본 형사들이 아버지 점포를 수색하여 그 돈을 압수해 갔어요. 물론 아버지도 끌려가셨지요. 아버지는 구속된 지 105일 만에 풀려 나왔어요."

다석은 뒷날 "기미년 3·1운동 때 형사가 가택수색을 하면서 무슨 말로 심문할 때 눈을 똑바로 떠서 형사의 얼굴을 노려보시던 우리 아버지의 눈을 잊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다석이 잊지 못한 아버지의 눈은 또 있다. "돌아가시기 두어 분시 전에 누우신 자리에서 일으키라고 하여 두어 사람이 반신을 일으켜 드리는데, 마주 앉아 뵙는 내가 보기에 얼굴에 뒤틀리는 주름을 보면서 '다시 누우십시오. 못 일어나십니다'고 한즉, '왜!' 하시면서 가장 크게 눈을 뜨셔서 나를 바라보시던 우리 아버지의 눈을 나는 잊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눈'에 대한 기억이 있는 자식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추원(追遠: 追遠報本 조상의 덕을 추모하며 자기의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음)의 의미일 수 있다.

그러나 다석은 그 이상을 생각했던 것 같다. 가령 일본 형사를 노려본 것은 칼의 억압에 대한 항변이고, 임종 전에 부릅뜬 눈은 마지막 순간 아무 힘을 쓸 수 없는 약자의 몸짓이다. 성격은 다르지만 둘 다 분노의 표현으로 보인다.

현자 다석은 아버지의 눈을 생각하면서 분노를 분노로써 되갚지 않는 용서를 말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다음의 소식을 우리는 함께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 동진(東晉) 때 일이다. 대덕(大德) 구마라습의 제자로 스승을 도와 범어로 쓰인 부처님 법문을 한문으로 번역한 역경(譯經) 사업을 맡았던 한 걸출한 스님이 있었다. 그는 뜻하지도 않게 황제의 괘씸죄에 걸려들어 31살에 참수형을 당했다. 그 스님인 승조(僧肇)는 임종시(臨終詩)를 이렇게 남겼다.

四大元無主(사대원무주)

五蘊本來空(오온본래공)

將頭臨白刃(장두임백인)

猶如斬春風(유여참춘풍)

이 몸은 처음부터 주인이 없고, 내가 나라고 여기는 이 마음도 본래 비어있는 것이로다. 곧 내 머리를 흰 칼이 내려칠 것이지만 봄바람을 칼로 자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억울한 죽음인 줄 알면서도 악법도 법이기에 따라야 한다며 독배(毒杯)를 받아 마신 아테네 성인의 최후의 모습이나, 망나니의 칼날 앞에 앉은 승조스님의 열반의 노래에는 그 어디에도 분노라는 낌새를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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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석 유영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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