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과 경남도민일보가 함께 하는 습지 문화 탐방] (6) 화포천 습지
김해 진례면서 시작한 물줄기 '최대 하상 습지·생태계 보고·대통령 노무현'낳아
친환경 농업 봉하들녘 '황새 봉순이'휴식처로…봉화산 보살 '시대 변화'비추기도

◇경관이 빼어난 화포천습지

화포천 물줄기는 김해 진례면에서 시작된다. 진례면은 김해가 창원과 경계를 이루는 비음산·대암산·용지봉이 골짜기를 서쪽으로 펼쳐내리는 지역이다.

이들 산에서 비롯된 물줄기는 진례저수지 등에 들렀다가 골짜기를 빠져나오기까지 3km 정도 걸린다.

여기서 낙동강까지 화포천은 너른 들판을 끼고 북동쪽으로 15km 남짓을 구불구불 나아간다. 골짜기가 아닌 들판과 함께하는 화포천은 크게 둘로 나뉜다. 진영읍 본산리까지 7~8km는 너비 100m 안팎 좁은 둑에 갇혀 있다. 반면 본산리에서 낙동강까지 7~8km는 둑의 너비가 최대 700m에 이를 정도로 널찍하다. 화포천습지라고 일컫는 부분은 두 번째 구간이다. 하천 바닥에 이루어진 하상(河床)습지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이쪽저쪽 제방 사이 평균 너비를 250m로 줄잡아도 길이가 8km니까 넓이가 200만㎡=60만 평가량이다.

평지에 풀밭을 이룬 화포천습지.

화포천습지의 가장 큰 특징은 경관이 빼어나다는 것이다. 어디서 보아도 넉넉하고 그윽한 모습이다. 물줄기 가장자리에 왕버들이 낮게 엎드려 몽글몽글해져 있고 물길 한가운데로 마름·생이가래·자라풀·개구리밥이 둥둥 조용하다. 줄이나 갈대는 물 밑에 뿌리를 내린 때문에 절반이 물에 잠긴 채로 물결보다 더 섬세하게 바람에 반응한다. 그런 풍경 위로 오리·왜가리·백로·해오라기가 소리 없이 날아다닌다.

겨울에는 오리·기러기가 떼로 몰려 장관을 이루었고 보기 드문 고니들도 날개를 펴서 우아했다.

화포천습지는 다시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상류쪽에서부터 첫 번째가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화포교까지고 두 번째는 화포교에서 장재교까지며 세 번째는 장재교에서 한림배수장을 지나 낙동강과 합류하는 모정마을까지다.

첫 구간은 모두 농사를 짓지 않은 채로 '화포천습지생태공원'으로 공식 지정되어 관리를 받고 있다.

▲ 화포천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풍경.

둘째 구간은 습지에 무지하던 시절 쓰레기장으로 쓰였다가 지금은 운동장으로 탈바꿈한 데도 있고 사람이 들어가 농사를 짓는 데가 곳곳에 있지만 습지 경관은 여전하다.

세 번째 구간에서 화포천은 다시 좁아지는데 2006년 배수장 능력을 높이는 공사를 하며 이른바 '하상 정비'까지 하는 바람에 습지 경관을 많이 잃었으나 지금은 좀 나아졌다.

끝머리 풍경이 삭막하다 여길 수도 있지만 이런 느낌을 허물어줄 반전이 두 개 숨어 있다.

하나는 배수장 너머에서 낙동강과 화포천이 몸을 섞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물결은 풍성하고 수풀은 윤택하며 느낌은 고즈넉하다. 건너편 내달리는 산들도 잘 어울려 바람 따라 머리를 헹구며 한참을 앉아 있어도 좋은 자리다.

◇광주 노씨 김해 입향조의 모정비각

다른 하나는 모정비각(慕禎碑閣) 근처다. 화포천에 붙어선 낭떠러지에 있는데 배롱나무와 푸조나무쯤으로 짐작되는 높이 자란 나무들이 멋지다. 비각 안 빗돌에는 '贈吏曺判書海隱盧公之遺墟'(증이조판서해은노공지유허)라 적혀 있다. 주인공은 호가 '해은'인 노씨 집안 사람으로 세상을 떠난 뒤 이조판서 벼슬을 받았다. 이름은 한석(漢錫)이라 한다. 노한석은 광주 노씨 김해 입향조(入鄕祖=고장에 가장 먼저 들어와 살았던 조상)다. 병자호란이 지난 어느 해 창녕에서 낙동강을 건너 모정마을로 옮겨왔다.

보통 '모정'이라 하면 볏짚 같은 풀로 지붕을 이은 띠집(茅亭)을 이르지만 여기 모정은 그리워할 모(慕)를 앞에 쓰고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를 이르는 정(禎)을 뒤에 쓴다. 지금이야 단순히 사대주의의 산물로 여겨도 그만이지만 당시로서는 그렇게 잘라 말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을 맞아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주었다.

덕분에 의주까지 달아났던 임금 선조가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명나라가 그 바람에 힘이 빠지자 청나라가 만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크게 일으킬 수 있었다.

청나라가 조선을 쳤던 정묘(1627)·병자(1636) 양란이 일어난 뒤 1644년 명나라는 결국 숭정제가 자살하면서 멸망했다. 이런 국면에서 청나라를 물리치고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조선 선비의 의리론은 물론 비현실적이었지만 어떤 절절함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농사짓기가 허용되는 구간의 화포천습지 모습.

◇고향으로 돌아온 대통령

모정마을 일대에 자리잡은 광주 노씨 집안은 20세기 중반에 봉하마을에서 노무현을 낳았다. 노무현은 2003년부터 5년 동안 제16대 대통령을 지낸 뒤 2008년 2월 25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대한민국은 퇴임한 뒤 고향에서 살아가는 대통령을 처음 얻게 되었다. 이승만은 하와이로 달아났고 박정희는 현직에서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은 임기를 마친 뒤 계속 서울에서 살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주민들과 환경운동에 나섰다. 농약과 쓰레기로 숨통이 막힌 화포천을 되살리고 봉하들녘 논밭을 친환경농업으로 되살리는 작업이었다.

퇴임 첫해 봉하들녘에 농약 대신 오리를 집어넣는 농사로 가을에 2만4600평 논에서 쌀 55t을 거둘 수 있었다. 오리농법으로 지은 봉하쌀은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덕분에 봉하들녘의 친환경농업은 계속 면적을 넓힐 수 있었다.

친환경농업은 생태연못·무논과 더불어 봉하들녘을 생물다양성을 갖춘 습지로 재탄생시켰다. 드렁허리 같은 물고기와 논고둥, 여러 벌레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먹을거리가 풍성해지니까 철새들도 더 많이 찾아오게 되었다.

주변 습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지은 갈대집.

◇대한해협 건너 봉하마을 찾은 봉순이

절정은 2014년 3월 18일 황새 '봉순이'의 출현이다. '봉하마을을 찾아온 암컷 황새' 봉순이의 발목에는 'J0051'이라 적힌 가락지가 끼어 있다. 일본 효고현 도요오카시 이즈시정에서 2012년 4월 6일 태어났다는 표지다.

봉순이는 800km를 날아 대한해협을 건넌 첫 일본 황새가 되었다.(2015년 2월 8일에는 제주도에서 도요오카 출신 수컷 황새가 발견되어 '제동이'가 되었고 같은 해 7월 15일에는 태화강에서도 도요오카 출신 수컷 황새가 눈에 띄어 '울산이'가 되었다.)

그해 봉순이는 봉하들녘과 화포천 일대에서 9월까지 머물다 하동 섬진강과 충남 서산 천수만으로 옮겨갔다.

이듬해에는 3월 9일 봉하들녘을 다시 찾았다가 곧바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미 멸종된 황새가 다시 찾아오면 들녘과 주변 생태가 그만큼 청정해진 마을이라는 얘기가 되고 거기 농산물 또한 건강하고 깨끗하다는 증거가 된다. 2016년에도 봉순이는 비슷하게 옮겨다니면서 4월 7일 봉하들녘을 찾아 사나흘 묵었다.

하지만 올해는 5월이 다 지나가는 지금껏 나타나지 않고 있다.

대신 2월 26일 함안 악양둑방 근처 남강변, 2월 28일~3월 1일 창녕 우포늪, 3월 8일 창원 주남저수지, 3월 12일 마산 봉암갯벌을 찾았다. 봉하들녘이 지난해부터 먹이터로 합당한 조건을 잃고 있기 때문이지 싶다. 농업진흥구역(절대농지) 유지를 반대하는 쪽에서 중장비로 흙을 쌓아 형질변경도 하고 2008년 이후 쓰지 않던 농약도 쳤다고 한다. '사람 싸움에 황새등 터지는 격'이라고 할까.

◇봉화산이 품은호미 든관음보살 두 분

뒤편 봉화산에 오르면 이런 사연과 문화를 품은 봉하들녘과 화포천이 한눈에 담긴다. 노무현 대통령은 생전에 봉화산이 '낮으면서도 높은 산'이라 한 적이 있다. 해발 150m밖에 안 되니 낮은 산이고 마루에 서면 사방 50리가 보이니 높은 산이라는 얘기다. 정상을 향해 오르면 '호미 든 관음상'이 먼저 눈에 띈다. 관음보살은 보통 왼손으로 보리수를 쥐고 오른손은 약병을 들지만 여기 관음보살은 약병에 보리수를 꽂아 왼손에 맡기고 오른손은 호미를 들었다. 호미 든 관음상은 6·25전쟁으로 심해진 헐벗음이 채 가시지 않은 1950년대 중반부터 봉하마을 일대에서 불교도들이 벌였던 농촌개척의 상징이다.

스물넉 자 높이인 정상 관음상은 1999년 10월 두 번째로 세워진 것이고 1959년 처음 세워진 열두 자 높이는 조금 아래에 있다. 두 분 관음보살은 크기 말고도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다. 새 보살은 천연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옛 보살은 속이 텅텅 울리므로 인공 재질임이 분명하다. 새 보살은 얼굴에 웃음이 흐르고 살도 통통하지만 옛 보살은 웃음기도 덜하고 살도 오르지 않았다. 새 보살은 호미 쥔 손이 내려와 있으나 옛 보살은 올라가 있고 새 보살은 한 발이 앞으로 나와 있으나 옛 보살은 두 발이 나란하다.

세월이 흘러 후대 미술사가들이 두 보살을 비교·평가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옛 보살과 새 보살은 제각각 황폐한 50년대와 풍요로운 90년대의 반영이다. 새 보살은 옛 보살과 달리 오른발을 앞으로 역동적으로 내민 것과 호미를 바짝 당겨 들지 않고 긴장을 풀어 슬쩍 늘어뜨려 쥔 것은 자신감의 표현이다."

정상에 서면 멀리 화포천과 가까이 봉하들녘은 물론 노 대통령 묘역과 복원한 생가, 가족들이 살고 있는 자택 등도 한눈에 들어온다. 너른 마당에 편평하고 납작한 돌을 얹은 산소는 현대판 고인돌이고 생가는 일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흙·돌·짚을 쓴 생태 건축물이다. 화포천쪽에서 봉하마을로 향하는 들머리 영강사에도 이와 비슷한 갈대집이 있다. 적어도 100살은 넘은 집은 큰물이 져도 잠기지 않도록 비탈 높은 데에 앉았는데 이 또한 노무현 대통령 생가와 마찬가지로 습지 주변에 흔한 재료를 썼다. 오늘은 마침 노 대통령 세상 떠난 지 8년째 되는 날이다. 봉하마을 찾거들랑 마을만 돌지 말고 봉하들녘과 화포천습지까지 함께 둘러보면 좋겠다. 거기서 자라는 풀과 나무 사이에서 진하게 풍기는 '사람 사는 세상' 냄새를 맡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주관 :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

문의 : 환경교육팀 055-533-9540, gref2008 @hanmail.net

수행 :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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