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이 죽어간 소녀와 한 의사' 다르덴 형제의 열 번째 장편영화
'사라져 가는 죄의식·양심' 조명

진주시민미디어센터는 독립·예술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인디씨네'를 운영하고 있다. 40석의 작은 비상설 상영장으로, 매달 두 편을 선정해 매주 금·토요일에 상영한다. 작품 수도 상영 횟수도 적고, 때로 딱딱한 의자와 작은 스크린에 실망하며 돌아가는 이들도 있지만, 지역에 좀 더 다양한 영화들을 소개하고 관객들에게 영화 선택의 다양성을 제공하는 데 의미를 두고 10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다. 조촐한 영화관이다 보니 자주 관객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다. 작품 선정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관객이 영화를 해석할 때 이야기는 더욱 재밌어진다. 5월에 상영하고 있는 <언노운 걸>이 그런 영화다.

다르덴 형제의 열 번째 장편영화 <언노운 걸>(2016)은 교외 작은 클리닉에서 임시로 일하는 의사 제니가 주인공이다. 임시 기간이 끝나면 이름 있는 연구센터에서 일하게 될 정도로 능력 있는 그녀다. 제니와 헤어지는 게 아쉬운 환자가 깜짝 공연도 해줄 만큼 사랑 받는 의사이기도 하다. 어느 날 진료 시간이 끝난 클리닉에 벨소리가 울린다. 인턴 줄리앙에게 의사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던 제니는 진료시간이 끝났다는 이유로 응답하지 않는다. 다음날 경찰이 찾아와 근처 공사장에서 신원불명의 소녀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클리닉 현관 CCTV에는 어젯밤 다급하게 벨을 눌렀던 소녀의 모습이 담겨 있다. 소녀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 제니는 연구센터를 포기하고 소녀의 행적을 직접 찾아 나선다.

영화 〈언노운 걸〉 스틸컷.

흥미로운 수다는 바로 여기, 제니의 죄책감에서 시작한다. 사람을 살리는 의사라는 직업상 제니가 도의적인 책임을 느낄 수는 있다. 그런데 그 책임감이 이직을 포기할 정도로 무게가 있나? 줄리앙에게 '의사는 감정을 억누르고 강해져야 한다'고 훈계하던 그 제니가 말이다. 제니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감정이입이 힘든 관객들은 이후 영화 전개에 마음 붙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반대로 초반에 물음표를 띄웠다가 끝에 그녀의 죄책감을 이해하는 관객들도 있다. 환자들의 고통에 동참하려 하고 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제니를 보며 간질간질한 무언가를 느끼게 되는 경우가 그랬다.

제니의 죄책감과 이후의 행동들은 다르덴 형제가 영화로 꾸준히 해왔던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로제타>(1999)의 빈민 실업자, <아들>(2002)의 소년원 출신 범죄자, <자전거 탄 소년>(2011)의 버림받은 소년, <내일을 위한 시간>(2014)의 해고 상황에 놓인 노동자 등 다르덴 형제는 경쟁 사회에서 생존에 위험을 느끼는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이들은 동시에 현대 유럽이 안은 문제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었고, 이들의 행위와 그 이면을 함께 보여주면서 관객들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 속에 있는 정의와 용서, 책임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언노운 걸>에서도 관객들은 제니를 통해 흑인 이민자 소녀와 소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주변 인물들을 만난다. 그러면서 우리는 스크린 밖에 있는 파편화된 관계를 돌아보게 된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괜찮은가? 현실에서 제니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무엇을 중심에 두고 살아야 하는지까지 묻게 된다. 영화로 시작해 수학공식처럼 정확한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제니를 '아무것도 안 하는 걸 거부하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걸 거부'하는 캐릭터라고 표현한 다르덴 형제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구구절절 영화에 대한 설명을 이어보지만 이 역시 <언노운 걸>을 보는 많은 시선 중 하나가 될 테다. <언노운 걸>에 대해 어떤 리뷰어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 중 큰 강렬함이 없다며 아쉬움을 표했고, 한 매체는 난민 문제를 인사이더의 논리로 마무리했다는 비평을 실었다. 일순간 혹시 내가 영화를 두고 잘못된 소리를 하는 건 아닌지 두려워지지만 곧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진다. 다른 경험과 시각이 만들어낸 다른 생각을 만나 자신의 생각을 살펴보는 이런 경험들이 재미있지 않은가?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렇다면 금·토요일에 진주 인디씨네에 들러주시라. 당신의 영화 이야기로 작은 상영관을 가득 채우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조정주(진주시민미디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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