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서 봄을 거닐다

지리산으로 향하다

4월은 꽃의 계절이다. 3월 매화로 시작해 4월이면 온갖 꽃들이 피어나 절정을 이룬다. 그중에서도 벚꽃이 가장 인상적이다.

나는 해마다 벚꽃앓이를 한다. 길을 따라 줄지어 피어있는 벚꽃들을 멀리서 보면 마치 안개 띠가 펼쳐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벚꽃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일 듯 만개했다가 그 하얗고 창백한 꽃잎이 바람을 타고 날릴 때 나는 앓는다. 그 앓이의 정체는 명확하지 않다. 황홀하게 피었던 벚꽃이 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또 하나의 봄이 가고 세월 흘러감이 안타까운 것인지. 다만 가슴이 뭉클하고 아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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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은사에는 소나무 숲을 조용히 거닐 수 있는 산책로가 있다. /조재영 기자

 

모터사이클을 취미로 삼은 이후로는 매년 그 벚꽃앓이를 만끽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처럼 들리지만, 벚꽃잎 휘날리는 길을 따라 달리며 실컷 아파하고 그 여운을 가슴에 담는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집을 나선 것은 금요일 아침과 점심 사이였다. 10시가 지나서였으니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 늦게 아침 식사를 하고 케냐AA 원두커피까지 갈아서 한 잔 내려 마시고 나서야 출발했다. 춥지도, 덥지는 않은, 달리기 딱 좋은 날씨였다. 목적지는 오랜만에 지리산이었다. 겨우내 가지 않았던 지리산이다. 이제 봄이 왔으니 다시 가봐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이 들었다. 왜 그럴까? 유난히 산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단순히 지리산이 그곳에 있기 때문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지리산이 품고 있는 다양한 매력, 그것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고 그 매력을 한 단어로, 한 줄 글로 표현할 만큼 나는 통찰력이 뛰어나지 않다.

함안을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고 의령으로 넘어갔다. 의령은 남에서 북으로 질러갔다. 의령 대의면에서 20번 국도(지리산대로)를 타고 산청 생비량면으로 접어든 뒤 장란보에서 잠시 쉬었다. 장란보 옆에 쉬어가기 좋은 정자와 그네 의자가 있다. 화장실이 없는 것이 아쉽다. 그곳 작은 숲에도 벚꽃이 만개했다. 이틀 전에 내린 비에 양천이 시원하게 흐른다. 양천을 가로지른 장란보 아래 하얀 물거품이 인다. 고속으로 달리면 날벌레가 헬멧 쉴드에 부딪혀 생을 마감한다. 쉴드에는 날벌레의 잔해가 남아있게 된다. 그 생명들에게는 미안하다. 정자에서 헬멧 쉴드에 붙어있는 날벌레의 흔적을 닦아내고 다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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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군 생비량면 장란보 옆 쉼터에 있는 그네의자. /조재영 기자

 

구형왕릉

신안면까지 가서 3번 국도로 갈아탄다. 경호강 줄기를 따라가는 산청의 3번 국도는 그 달리는 맛이 남다르다. 4차로의 넓은 길이지만 완만한 곡선으로 이어져 지루하지 않고 길과 함께 흐르는 경호강의 풍광이 눈을 즐겁게 한다. 단숨에 산청읍까지 달려가서 3번 국도에서 내렸다. 모터사이클은 산청읍내를 지나 동의보감촌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동의보감촌까지 가는 길은 한산하다. 다니는 자동차가 거의 없다. 길을 전세 낸 듯 여유롭게 달리다 보면 금새 동의보감촌이다.

동의보감촌이 전국에 제대로 알려진 모양이다. 평일인데도 관광버스가 여러 대 도착해 있다. 버스에서 내린 관광객들이 가게 앞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 점심 먹을 준비를 하고 있다. 화장실에 들러 걱정(?)을 내려놓았다. 절집에서는 화장실을 해우소라고 하지 않는가. 동의보감촌은 다음에 다시 둘러보기로 하고 곧바로 출발한다. 작은 고개를 넘으면 금서면 소재지까지 구불구불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내리막길의 끝에 경호고등학교와 작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 도착하기 직전 덕양전이 있고 그곳에서 산 쪽으로 방향을 틀어 1km쯤 올라가면 구형왕릉이 있다.

구형왕릉 앞 안내판에 있는 글을 옮겨 정리하면 이렇다.

구형왕릉

구형왕릉은 가락국 제10대 임금인 양왕의 묘다. 국내 유일의 피라미드 형식의 석릉이다. 일반 봉토 무덤과는 달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산기슭 경사면에 크고 작은 암석을 쌓아 총 일곱 단의 층을 이루며 정상부는 타원형이다. 전면 중앙에서부터 높이 1m 내외의 담이 둘러져 왕릉을 보호하고 있다. 앞면 전체의 높이가 7.15m다. 하단 길이 25m, 4단 중앙에 가로세로 40cm, 높이 68cm 석문이 마련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산청현읍지, 대동지지, 조헌환여승람 등에 구형왕릉에 대한 기록이 있다.

구형왕

가락국 제10대 구형왕은 가락국시조 김수로대왕의 10세손으로 가락국(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다. 가락국 제9대 겸지왕의 아들로 서기 521년에 가락국 제10대 왕으로 등극했다. 휘는 구형, 존호는 양으로 계화왕후와 세종, 무력, 무득 세 아들을 두었다. 증손으로 흥무대왕 김유신, 5대 외손으로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을 두었다. 서기 532년(법흥왕 19년)에 전쟁의 피해에서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신라에 나라를 선양하고 가락지품천 방장산 속 태왕산으로 들어갔다. 나라를 내어준 까닭에 "돌무덤으로 장례를 치르라"한 유언으로 산 아래 언덕 석릉에 영면했다.

왕산

산청 방장산(지리산)중 왕산은 장대한 지리산맥의 동북쪽 끝에 있다. 가락국 시조대왕 김수로의 태왕궁지이다. 서기 162년 김수로 대왕은 첫째 왕자인 거등에게 나라를 양위하고 가락지품천 방장산 자락에 별궁을 짓고 태후와 함께 이곳으로 왔다. 왕의 호를 보주황태왕, 황후를 보주황태후로, 궁은 태왕궁으로, 산은 태왕산으로 명명하였다. 대왕은 태왕원군으로 38년간 살다가 기묘년 3월 23일에 서거하였다. 330여 년이 흐른 후, 서기 532년 가락국 마지막 10대 양왕(구형왕)이 시조대왕의 태왕산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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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군 금서면에 있는 구형왕릉. 구형왕은 가락국의 마지막 왕이었다. /조재영 기자

 

간략하게 정리하면 가락국 시조대황인 김수로가 서기 162년에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이곳에 들어와 38년간 살다가 죽었다. 산 이름을 태왕산이라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김수로의 10대손이자 가락국 마지막 왕이었던 구형왕이 서기 532년에 신라에 항복하고 이곳에 들어와 살다 죽었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죄를 스스로 물어 흙이 아니라 돌로 무덤을 쌓으라고 유언했고, 그 유언에 따라 석릉이 만들어졌다.

안내문을 보고 있자니 의문이 생긴다. 가야는 각기 독립국 형태의 6가야로 이뤄져 있었고 이곳은 금관가야의 영토가 아니었는데 어찌 김수로대왕과 구형왕이 이곳까지 왔을까 하는 것이다. 지금은 김해에서 산청까지 자동차로 두어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지만 1500년 전, 걷거나 말을 타고 이동하기에는 아주 먼 거리다. 더구나 그때는 도로와 다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산을 넘고 얕은 곳을 찾아 강을 건넜을 것이다. 여러 문헌에 기록이 있다고는 하지만 단편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의문을 풀기는 쉽지 않다.

무덤 앞을 지키는 석상 중에 사자상이 눈에 띄었다. 무슨 동물인가 싶어 자세히 봤는데 분명히 암수 사자 한 쌍이었다. 1500년 전 우리나라에 사자가 있었을 턱이 없다. 그런데 어찌 사자상을 만들었을까? 그 시대에도 인도를 비롯한 외국과 문물교류가 활발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일까? 그리 보면 허황후가 인도에서 왔다는 것이 단지 전설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엔진도 없고 GPS도 없었던 시대에 어떻게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 여기까지 왔을까? 인도의 공주가 아니라 그냥 표류하던 배가 불시착했는데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이 인도 사람들이었고, 그중에 여인 한 사람이 왕비로 간택된 것은 아니었을까?

구형왕이 묻혔다는 석릉을 둘러봤다. 봄 햇살이 따듯했다. 덥지도 않고, 쌀쌀하지도 않고 '따듯하다'는 표현이 적당한 그런 햇살이 석릉에 내려앉았다. 햇살 때문에 눈이 부셨다. 나라를 신라에 내준 구형왕은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쓴 풀뿌리를 캐 먹으며 재기를 꿈꾸었을까?

석릉의 중간 높이쯤에 작은 문 같은 것이 만들어져 있다. 무슨 용도의 문일까? 피라미드라고 치면 무덤의 중심부까지 이어진 통로가 아닐까? 영혼이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문일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석릉 옆에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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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지켜주는 헬멧. / 조재영 기자

 

임천교 지나 지리산 품으로

채비를 갖춰 다시 출발했다. 임천을 가운데 두고 산청군 금서면과 함양군 유림면이 마주 보고 있다. 임천교에서 지리산 쪽을 잠시 바라본다. 임천은 수량이 많아져 강폭을 가득 채웠다. 아직 어린 벚나무가 강변길을 따라 길게 꽃을 피웠다. 멀리 지리산줄기 봉우리에는 겨우내 쌓였다가 아직 다 녹지 않은 잔설이 보인다. 멀리 능선을 따라 오르던 거북이가 멈춰 서 있는 듯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언제나 그것이 보이면 "이제 지리산 품으로 드는구나"하는 생각을 한다.

이제 지리산 깊숙이 들어간다. 휴천면을 지나고 마천면에서 전남 남원시 산내면으로 넘어가기 전에 백무동으로 꺽어들어 간다. 버스가 들어가는 가장 안쪽인 벽소령휴게소까지 갔다가 되돌아 나와서 다시 백무동 버스 종점까지 간다. 백무동 쪽은 도로 폭을 넓히는 것인지 공사가 한창이다. 백무동 쪽도 모터사이클에서 내리지는 않고 버스 종점까지만 갔다가 되돌아 나온다. 마치 순찰이라도 하는 듯.

산내면 소재지도 지나고 달궁도 지난다. 스쳐 지나는 길가 음식점에 BMW 모터사이클 여러 대가 서 있다. 라이더들이 손을 들어 인사한다. 나도 손을 들어 인사하면서 지나간다. 라이더들의 인사법이다. 단숨에 중턱까지 올랐다가 심원마을 간판을 보고 심원마을로 내려갔다. 3년 전에 클럽 라이더들과 피서를 왔던 곳이다. 지리산 국립공원 보전을 위해 심원마을 철거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궁금했다. 심원마을은 대부분 음식점과 숙박시설이다. 마을로 내려가 보니 일부는 아직 남아있고 계곡과 접한 쪽은 이미 건물 여러 채를 뜯어내는 중이었다.

계곡에 있는 심원마을에서 지리산 횡단도로로 오르는 길은 많이 꼬불꼬불하고 가파르다 조심해야 한다. 금방 성삼재휴게소에 도착한다. 오늘은 무정차 통과다. 바로 아래 시암재휴게소에서 볼일이 있어서다. 그 볼일이란 게 점심을 해결하는 것이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다. 커피가 땡겼다. 그래도 간단하게라도 배를 채워야 하니 시암재에 오면 늘 먹는 왕호떡 2개를 먹었다. 아메리카노도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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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암재휴게소에 갈때마다 먹는 왕호떡. /조재영 기자

 

천은사

시암재부터 구례까지는 전체 구간이 내리막길이다. 시동 걸고 출발하면 스로틀을 당기지 않아도 구례까지는 그냥 굴러갈 정도다. 하지만 경사와 굴곡이 심하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다. 엔진브레이크를 이용하며 조심조심 내려가야 한다. 내리막길 끝에 큰 저수지가 있고 그 안쪽에 천은사가 있다.

천은사는 지리산 횡단도로 초입에 있어 지나갈 때마다 그 입구가 빤히 보이지만 대부분은 지나쳐 가는 장소였다. 천은사에 왔던 적이 5년은 족히 지난 듯하다.

통일신라시대 서기 828년에 인도에서 온 승려와 덕운선사가 창건했다는 천은사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온다.

천은사에는 물을 마시면 정신이 맑아진다는 샘이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절이 불타고 그 뒤에 다시 지을 때 샘에서 큰 구렁이가 자꾸 나타나 이를 잡아 죽였다고 한다. 그랬더니 샘물이 솟아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을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라고 했는데 그 뒤로 절에 원인 모를 화재와 재앙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 4대 명필 중의 한 사람인 이광사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물 흐르는 듯한 필체로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써 절 일주문 현판으로 걸었는데, 그 뒤로는 화재와 재앙이 끊어졌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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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은사 수홍루. /조재영 기자

 

모터사이클을 일주문 밖 주차장에 세워두고 절 안으로 들어갔다. 산에서 내려온 계곡이 저수지와 합쳐지는 곳에 수홍루가 있다. 저수지를 배경으로 아치형 다리 위에 자리 잡은 수홍루의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다만 아치형 다리가 옛 석축 형식이 아니라 콘크리트여서 아쉬웠다. 아마도 옛날에는 석축이었는데 이런저런 사연으로 무너지고 콘크리트로 보수하지 않았을까 싶다.

절 안으로 들어서니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공사 때문에 소란스러운 절 마당을 벗어나 뒤란으로 나갔다. 절 위쪽 차밭으로 가는 길이 나 있다. 절 담장을 따라 나 있는 길이 예쁘다. 아무것도 꾸미지 않아도 그렇다.

이 절 극락전에는 아미타후불탱화가 있는데 보물 924호로다. 전문가들은 18세기 한국 불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탱화보다 더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차밭 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다. 한눈에 봐도 그 모양이 장대하다. 나이가 300년 정도 된 보호수다. 보통 이렇게 오래된 나무는 큰 줄기가 꺾이거나 한쪽이 말라 병든 경우가 많은데 이 소나무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이 늠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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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군 금서면과 함양군 유림면 사이 임천강 임천교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멀리 능선을 자세히 보면 산을 오르다 멈춰 선듯한 거북이의 형상이 보인다. /조재영 기자

 

가까이 다가가서 봤는데 철갑 같은 껍질에 섬세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물론 누가 새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런 것이다. 아름다운 무늬를 한참 들여다봤다. 정형화된 듯하면서도, 단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무늬. 어찌 그런 무늬를 만들어내는지, 경이로운 자연이다.

귀가할 길이 멀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해가 길어졌기 때문이다. 거기다 돌아오는 길은 전국에서도 이름난 벚꽃길이다. 섬진강 상하류를 따라가는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으로 내려간다. 평일인데도 화개장터를 2km 정도 앞두고 길이 꽉 막혔다. 벚꽃 축제를 찾아온 차들이다. 막히는 구간을 지나자 하동읍까지는 시원하게 달린다. 절정을 이룬 벚꽃 터널 길이 이어졌다. 며칠 지나면 꽃잎이 눈처럼 흩날릴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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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은사 위 차밭에 있는 보호수 소나무.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무늬가 경이롭다. / 조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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