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산] (10) 의령

산 넘어 산, 그 너머에도 산이다. 의령 자굴산(897m) 정상. 어느 방향으로 눈길을 돌려도 산등성이와 봉우리가 겹을 이뤘다. 의령은 산지 비율이 높다. 2015년 기준 전체 70%를 차지한다. 비율만 보면 지리산과 덕유산으로 둘러싸인 함양과 견줄 만하다.

의령 산세는 크게 두 개 산군(山群)으로 나뉜다. 우선 한우산(836m)과 자굴산에서 시작하는 산군은 의령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주로 동남쪽으로 수많은 지맥을 뿌리며 남강과 낙동강변에 이른다. 기운이 상당해 호암 이병철 등 이름난 인물 여럿이 이 지맥 아래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이어 국사봉(國士峰·669m), 미타산(彌陀山·662m) 줄기를 중심으로 한 산군은 의령 북쪽 산들을 거느리며 합천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봉무산 왕뒤 이야기

조선시대 의령 지도는 대부분 한우산·자굴산 산군을 중심으로 그렸다. 궁류면에 있는 만지산(606m) 주변을 합천과 경계 지역으로 표시했다. 만지산은 신반천을 경계로 봉수면 국사봉과 마주한 산이다. 만지산에서 자굴산, 벽계산(碧溪山) 줄기가 이어진다. 이들 지맥은 크게 자굴산 줄기로 보면 된다. 벽계산이 오늘날 어느 산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벽계관광지가 들어선 벽계리와 관련이 있지 싶다. 이 벽계산 줄기에서 이어진 것이 덕산(德山)인데, 조선시대 의령의 진산(鎭山·고을을 수호하는 산)이다.

덕산은 현재 의령군청 뒤편 호국공원이 있는 낮은 등성이, 봉무산(鳳舞山)이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덕산을 신덕산(神德山)과 그 아래 봉덕산(鳳德山)으로 나눠서 그렸는데, 봉덕산이 지금 봉무산이 된 듯하다. 이 주변 산세가 봉황새가 알을 낳고 앉아 있는 모양새라 봉황새 봉(鳳)자를 썼다.

조선시대 의령 진산인 덕산(봉무산). 가운데 하얀 탑이 보이는 봉우리가 '왕뒤'다. /유은상 기자

봉무산은 '왕뒤(왕띠)'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이는 왕의 마누라(왕비)라는 뜻이라고 한다. 실제 조선 24대 왕 헌종(재위 1834∼1849)의 비 효현왕후 김씨가 어릴 적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효현왕후는 순조 33년(1833년)에서 헌종 1년(1835년)까지 2년간 의령현감을 지낸 김조근의 딸이다. 당시 현감의 사택이 봉무산 근처에 있었는데, 이후 딸이 왕비가 되어 사람들이 왕뒤라고 불렀다고 한다.

실제로 주민들은 왕뒤보다는 '왕띠', 이렇게 조금 센 발음으로 부른다.

지난 2013년 의령군은 봉무산 정상에 호국공원을 조성했다. 나무가 울창해 전망은 별로고, 그냥 조용히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봉우리가 겹을 이룬 의령 산세를 잘 묘사한 <1872년 지방지도>. /의령군지

◇남산 대나무숲 이야기

의령읍 남강변에 우뚝 선 충익사 의병탑은 의령을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다. 그 의병탑 뒤로 든든하게 서 있는 산이 남산(321m)이다. 둘레길이 잘 만들어져 있다. 옛 이름은 구룡산(九龍山) 혹은 거북 구(龜) 자를 써 구룡산(龜龍山)이라고 했다. 지금도 남산 동쪽 기슭에 구룡마을과 그 앞 구룡농공단지, 구룡사거리에 이 이름이 남아 있다. 의병교에서 바라보면 의병탑 왼쪽 위 남산 중턱에 둥그렇게 주변과 구별되는 부분이 있다. 제법 넓은 대숲이다. 예사로 보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신경 써서 보면 제법 두드러진다. 대숲은 조선시대 황덕유라는 의령현감과 관련이 있다. 이분은 학식이 꽤 풍부한 사람이었는데, 풍수지리에도 조예가 깊었다. 인조 18년(1640년) 황 현감이 당시 관아 뒤 고을 진산인 봉무산(당시에는 봉덕산이었겠다)과 마주 본 남산(구룡산)에 대나무를 심게 했다. 대나무는 봉황이 좋아하는 먹이다. 더러 의령 성씨 중 세력이 강했던 진주 강씨의 기를 꺾으려 그랬다는 말도 있지만, 봉황 먹이설이 설득력 있다. 산 이름에 봉황새 봉(鳳)자가 들어간 곳 주변에 이렇게 대나무를 심은 사례가 여럿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당시 심은 대나무가 점점 영역을 넓혀 지금은 산 중턱에 떡 하니 존재감 있게 자리 잡았다.

남산. 산 중턱에 둥그렇게 대숲이 있다. 이 대나무는 조선시대 황덕유 현감이 심었다. /유은상 기자

사실 황덕유 현감은 대나무를 심은 일보다 치수를 훌륭하게 한 것으로 더 잘 알려졌다. 이를 증명하는 게 의령군민회관 입구 느티나무 아래 있었던 소황제(紹黃堤) 비석이다. 도로를 확장하면서 지금은 의령읍에서 정암교 가는 길 백야오거리 앞 88동산으로 옮겨졌다.

이 비석은 일종의 제방준공기념비다. 소(紹)는 앞의 일을 잇는다는 뜻이고, 황(黃)은 황덕유 현감이다. 그러니까 황덕유 현감의 뜻을 잇는다는 말이다. 1901년 당시 정봉수 군수가 지은 것이다. 비문은 대강 이렇다. 황덕유 현감이 옛날 의령읍을 지키려고 제방을 쌓았는데, 광무 5년(1901년)에 폭우로 무너진 것을 정봉시 군수가 복구하며 황 현감의 뜻을 이었다. 의령문화원 향토사문화연구소 신경환(64) 소장은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황 현감이 제방을 쌓기 전 의령 읍치는 자주 물난리를 겪었다고 했다. 큰 홍수가 든 어느 해 보다 못한 황 현감은 조정에 장계를 올려 수재민을 먹여 살릴 양식과 제방 구축 비용을 얻었고, 주민들이 힘을 합쳐 제방을 쌓았다는 내용이다.

◇봉황대와 김춘추 이야기

한우산·자굴산 산군의 북쪽 끝 자락 중 하나가 봉황대(鳳凰臺)다. 궁류면 평촌리 지방도를 지나다 보면 보인다. 깎아지른 암석 절벽이 기가 막힌 곳이다. 이곳에 자리 잡은 사찰 일붕사는 기네스북에 오른 동굴법당으로 유명하다. 신라 성덕여왕 26년(727년) 혜초 스님이 서역에서 돌아오는 중 꿈에서 지장보살이 점지해 준 기암절벽을 찾았는데, 봉황대가 가장 비슷했다고 한다. 그래서 성덕사란 사찰을 지었는데 이것이 일붕사의 전신이라 전한다. 봉황대는 암벽이 봉황의 부리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이곳이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왕자일 때 사용한 첫 군사요새라는 것이다. 그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 데 기틀을 쌓은 이다. 기록에는 태종왕자 3인이 이곳에 군대를 주둔했다고 돼 있다. 당시 신라 최고 부대였는데, 그 이름이 봉황대였다고 한다. 부대 이름이 그대로 산 이름이 된 것이다.

세계 최대 동굴법당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일붕사.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전설이 어린 봉황대 절벽 아래 있다. /유은상 기자

◇미타산과 국사봉 이야기

봉수면 신현리 국사봉(669m)에서 시작해 천황산(657m), 미타산(663m)으로 이어지는 등성이 길은 등산객들이 제법 찾는 종주 산행코스다.

국사봉은 봉수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산 정상 바위 숲이 장관이다. 신반천을 사이에 두고 만지산(萬芝山·606m)과 마주 보고 있다. 비슷한 높이와 모양새여서 그런지 두 산 사이에 힘겨루기 전설이 전해진다. 국사봉 장수와 만지산 장수가 큰 바위를 상대방 쪽으로 던지며 힘자랑을 했다. 그러다가 바위 하나가 두 산 사이에 있는 서암 마을에 떨어졌다. 마을 사람이 다칠 뻔했기에 두 장수는 힘겨루기를 그만뒀다. 이 바위는 현재 서암 마을회관 곁에 있다. 또 만지산 장수가 국사봉 장사에게 던진 바위는 그대로 산꼭대기에 세워져 까막새미라 불리는 바위 숲이 됐다. 이 때문에 국사봉이 만지산보다 더 높아졌다고 한다.

천황산과 미타산 산세는 사실 합천 초계들판에서 바라보면 더 잘 보인다. 미타산이란 이름은 산 모양이 민드름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불교식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미타'는 서방정토에서 불법을 설하는 대승불교의 부처 아미타불이고, 옛날 나라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승려를 '국사'라고 하니 이 주변 산봉우리 이름과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만큼 미타산과 그 주변 산세가 영험하다는 해석이겠다. 이를 증명하듯 미타산에는 대문바위나 상사바위, 쿵쿵길, 항상 흙탕물이 나오는 우물 등 다양한 전설이 전한다.

[참고문헌]

<의령군지>(의령군지편찬위원회, 2003)

<의령의 금석문화>(의령문화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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