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로 옆 사유지 밭에 써놓은 경고문
시골인심 변했다고? 모두 원인 있는 법

한 달 남짓 되었다. 휴일이면 하루 서너 시간씩 걸었다. 주말에 이틀 정도 걷고 나면 몸과 마음이 거뜬해졌다.

갓 수술을 마친 다리의 성능시험을 해봐야겠다는 기분으로 시작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화와 동백·벚꽃·산수유·배꽃 등이 흐드러진 봄을 만끽하고 싶은 마음도 하나, 무엇보다 내가 몸담고 있는 문학관 주변의 이웃들과 눈을 맞추고 그들의 온기를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오래 묵혀두었던 다리지만 성능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연식이 어느 정도 되다 보니 여기저기서 삐걱대고 수리를 요구하는 신호가 나타났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본래 중고물품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손보고 신경을 좀 써야 하지만 그 정도는 감안하고 써야 한다는 것. 게다가 그것이 아예 새것으로 갈아치우기 어려운 내 신체 일부임에야. 폐기해야 할 정도가 아닌 것을 다행으로 알고 살살 달래가면서 계속 쓸 수밖에.

꽃은 치유 능력이 있다. 병원에서 고치지 못하는, 혹은 어려운 것도 꽃은 단지 그 존재만으로 의술을 발휘한다. 영어나 한자투성이의 책을 끼고 의과대학 과정을 거치지 않았고, 살을 찢거나 꿰매지 않으면서도 병을 고치는 기술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조팝꽃·할미꽃·노루귀·제비꽃·금낭화·붓꽃·은방울꽃·자운영….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만 같다.

사실 걷는 일의 즐거움을 모르는 이는 드물다. 걸을 때의 육체적 고통이 쾌락으로 전이된다고 한다.

오래 걸으면 육체적으로 힘들지만 그것을 힘들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즐겁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걸을 때 부신피질에서 분비되는 엔도르핀이 고통부호를 만드는 신경세포의 뉴런 회로를 차단하고, 대신 쾌락을 자극하는 흥분제를 분출시킨다는 것.

하지만 즐거운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기저기 핀 꽃의 사진을 찍고 들여다보면서 만나는 이웃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으나 그들의 반응은 사뭇 미적지근하다.

경계의 눈빛을 되쏘는 이들도 있다. 일옷을 입고 한 손에 호미나 괭이를 들고 그저 묵묵히 하던 일에만 골몰하기도 한다. 여든을 넘긴 어르신은 밭 주변으로 말뚝을 박고 노끈으로 두세 번 둘러친다.

산돼지나 고라니를 막자는 건 아닌 듯하다. 밭에는 한창 파릇한 두릅이며 엄나무가 새순을 밀어올리는 중이다. 어르신은 볼 부은 표정으로 "등산객들이 지나가다 자꾸 손을 댄다"며 투덜거린다.

한참을 더 가자 할머니 한 분이 큰소리로 마구 호통을 치고 있다. 누구한테 그러는지 주위를 둘러보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할머니는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들어보니, 누군가 고사리밭에 들어가서 마구 꺾어갔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삿대질을 하며 "이런 거 붙여놓으면 뭐해!" 분통을 터뜨린다. 거기에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푯말이 있었다.

"주변 농지 및 임야는 사유지로서 농작물과 임산물의 무단절취 행위를 금합니다. 무단 절취 시 형법 제329조의 규정에 의거 소유자로부터 절도죄로 고발될 수 있음."

자치단체에서 설치한 경고판이지만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듯하다.

화개장터 근처 관광객이 제법 많이 다니는 '박경리 토지길'을 걷다가 본 장면이다. 오륙십대 아주머니가 밭에서 나물을 열심히 캐고 있어, 아∼, 장터에 나가 저걸 팔 모양이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근처에서 리어카 행상하는 상인이 "거, 밭주인 맞아요? 아닌 것 같은데 남의 걸 캐면 안 되지요" 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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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는 엉거주춤 일어서며 "아니, 뭐, 나는 밭 아닌 줄 알고…" 하더니 비닐봉지에 담은 나물을 들고 가버리고. 누가 봐도 잘 가꾼 밭이었다.

시골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고들 한다. 아니, 요즘은 시골 사람들이 더 돈 밝히고 무섭다고 말하는 이들도 심심찮게 만난다. 그건,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한 이치다. 모든 것에는 그리된 원인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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