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 문화 탐방] (4-1) 함안 성산산성과 아라홍련
가야·신라흔적 비추는 1.4㎞ 산성
'목간·연실'과거-현재 교두보로
사람과 연꽃 안식처 습지이야기 가득

◇성산산성 = 성산산성은 함안군 가야읍 광정리 조남산(해발 136m) 정상에 있다. 1.4㎞ 남짓을 돌로 둘렀다. 무진정(이수정)에서 오르면 10분 안팎이 걸려 동문터에 이른다. 맞은편 서쪽이 가장 높고 그 다음 높은 북쪽에서 낮아지기 시작하여 가운데에 평지를 이룬 다음 남쪽으로 가면서 높아진다. 한복판이 옴폭한 분지이면서 동쪽으로 열려 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1991~2016년 조사했더니 600년대 초반 신라 사람들이 쌓은 석성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이나 <함주지>(1587년)에는 '가야 옛 성(伽倻 古城)' 또는 '가야국 옛 터(假倻國 舊墟)'로 나온다. 함안이 아라가야의 터전이었으니 잘못된 인식은 아니다. 먼저 아라가야가 쌓았고 신라는 나중에 562년 일대를 점령한 뒤 고쳐 쌓았을 것이다.

성산산성 동문벽.

신라 사람들이 쌓았음은 습지 둘레에서 나온 유물들이 알려주었다. 인공 연못인지 자연 습지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는데 아마 지하수 솟아나는 자리에 연못을 팠을 것이다. 특히 습지와 동문쪽 성벽 사이 부엽층에서 다른 유물들과 더불어 먹으로 글을 쓴 나뭇조각(목간木簡) 308점 등이 다량 출토되었다.

성산산성 건물터

◇쓰레기 더미 속 목간 = 지금껏 발견된 목간은 모두 1239점. 25%가 성산산성 한 군데에서 나왔으니 역사·고고학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학계는 목간이 산성을 쌓는 데 인력·식량·물자를 대는 과정에 쓰인 물품 표찰로 당시 지배체제의 실상을 일러주는 문화재로 여겨왔다. 2016년에는 네 면에 돌아가면서 모두 글자를 적어 넣은(56자) 사면목간이 눈길을 끌었다. 진내멸(眞乃滅) 촌주가 경주 관리에게 올린 보고서로 잘못된 법 집행을 두려워하는 내용이다. 1500년 전에 이미 문서행정과 율령(고대 법률)을 통한 지방 통치가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2015년 1월 8일 열린 한국목간학회 정기발표회에서 이주헌 가야문화재연구소 당시 소장의 '성산산성의 부엽층과 출토 유물의 검토' 논문이 발표되었다. 요지는 이렇다. "요즘 우리가 편지를 보관하지 않듯 옛날 사람들도 한 번 쓴 목간을 버렸다. 목기·토기·철기에 더해 동물뼈와 생선가시도 있었지만 갈대·나무껍질·풀·나뭇잎 같은 식물유기물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쓰레기더미를 물이 새지 않도록 하려고 퍼날랐다." 풀이나 나뭇잎이 쌓여 뭉쳐진 부엽층은 솜처럼 물을 머금어 밖으로 스며나가지 못하게 막는다.

◇산정습지 밑바닥의 연실 = 연실(蓮實=연 씨앗)도 나왔다. 2009년 5월 8일 습지 아래에 퇴적된 지층 4~5m 깊이에 10개가 박혀 있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탄소연대측정을 했더니 650년 전~760년 전인 고려시대였다. 습지 연꽃에 연밥이 달렸고 그 연실이 가라앉아 700년 세월을 견딘 것이다. 성산산성 산정습지는 두 번 눈길을 끌었다. 한 번은 목간으로 해당 분야 전문가들한테, 다른 한 번은 연실로 지역과 전국의 일반 대중들한테.

함안 산정습지. 습지임을 알려주는 지표식물인 억새와 물버들, 미나리가 자라고 있다.

"우와, 어떻게 조그만 씨앗이 600년 넘게 버티냐!" 물론 다른 나라에서는 2000년 넘었어도 연실이 싹을 틔운 적이 있다. 함안 고려 연실은 물에 불리니까 곧바로 닷새만인 13일 3개가 싹을 틔웠다. 하나는 나중에 포기를 나누어 네 개가 되었는데 2010년 첫 꽃대가 6월 20일 솟고 첫 개화는 7월 7일 벌어졌다.

짙지 않고 옅은 선홍빛이었다. 꽃잎은 숫자가 많지 않았고 전체에 색깔이 고르게 입혀져 있었다. 개량을 거듭한 요즘 연꽃과는 품격과 자태부터 달랐다. 고려불화 은은한 연꽃을 닮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함안군은 아라홍련이라 명명했다. 아라가야의 '아라'다. 처음에는 키우는 장소조차 공개하지 않았다. 지금은 함안박물관 근처에 시배지를 만들어 누구나 볼 수 있게 되었다. CCTV는 24시간 돌아가고 사람손이 연에 닿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함안박물관 근처에 조성되어 있는 아라홍련 시배지.

◇함안천과 이수정 = 조남산 정상에 서면 북쪽으로 너른 들판이 눈에 든다. 1900년대까지는 대부분이 갈대 무성한 늪지대였다. 왼편으로는 아라가야의 주인공들이 말이산을 베고 누워 고분군을 이루었다. 오른편에서 함안천은 남에서 북으로 굽이치며 남강을 향하여 엎드렸다. 사람들은 조남산과 말이산의 동·남·서쪽 기슭에 모여 살았다. 성산산성은 이 일대를 품고 앉아 장악하고 있다.

옛날 교통편의 중심은 뱃길이었다. 산길은 좁아서 짐이 많거나 무리지어 움직이려면 물길을 오가야 했다. 성산산성에서는 낙동강에서 남강으로 남강에서 함안천으로 들어오는 모든 배가 바로 파악된다. 이런 요충도 습지가 없으면 존속할 수 없었다. 그리고 습지에 기대야만 살 수 있는 것은 사람만 아니라 연꽃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남산 아래 무진정 일대는 함안천에 포함되는 자연 습지였다. 함안 조(趙)씨 집안에서 호가 무진(無盡)이고 이름이 삼(參)인 조상을 기리려고 1567년 정자를 세웠다. 둑까지 둘러서 정자와 연못을 함안천에서 독립시켰다.

성산산성 산정습지에서 고려시대 그 연꽃은 발아를 멈추었어도 여기 함안천과 무진정 연못에서는 싹을 틔우지나 않았을까.

부자쌍절각과 충노대갑지비.

부자쌍절각과 충노대갑지비는 연못에 붙어 있다. 함안 조씨 관련으로 쌍절각은 정유재란 당시 왜적을 조상 무덤을 파헤치는데도 못 막았다며 자결한 아버지(父)와 정묘호란을 맞아 전투에 나서 평안도 의주에서 숨진 아들(子)을 함께 기린다. 충노대갑지비는 쌍절각의 주인 아들을 모시고 종군했던 종놈 대갑이 주인공이다. 대갑은 혼자 돌아와 주인의 죽음을 유품과 함께 전하고는 주인을 잃었으니 무슨 낯으로 살겠느냐며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함안천은 이런 조선시대의 지배이데올로기도 함께 휘감고 흐른다. /공동취재단

이번 습지문화탐방 기사는 지면 사정으로 4월 18일, 25일 두 번에 나눠 싣습니다.

주관 :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

문의 : 환경교육팀 055-533-9540, gref2008@hanmail.net

수행 :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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