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만에 퇴임을 한 선배에게 안부 겸 요즘 어떻게 지내시느냐고 물었더니, 손자를 보며 소일한다기에 노후에 참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필자도 퇴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무척이나 손자를 보고 싶은데, 내가 손자를 낳을 수도 없고 아들과 며느리는 자기들 살기가 바쁘니까 부모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 일흔 가까이 되어서야 얻은 손자가 얼마나 예쁜지 장난감처럼 갖고 놀고 싶고 깨물어 주고 싶지만, 옆에 있던 할멈이 퉁명스럽게 자기 자식들이나 마누라에게 십분의 일만 해도 밉지는 않을 텐데 하고 시샘을 한다.

요즘 여섯살 된 손자 녀석이 유치원을 오갈 때 인사하는 모습이나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제비처럼 조잘거리는 모습이 몹시도 예뻐서 간혹 꿈에도 나타날 정도로 짝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망팔의 나이에 손자가 ‘레고’나 ‘퍼즐 장난감’을 가르쳐 준다기에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정신없이 더듬거리고 있으면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한 것 같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자라듯이 필자도 40년 넘게 아이들하고 생활하다가 퇴직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아이들의 함성이 귀에 쟁쟁하고, 가끔 동심으로 돌아가고픈 생각이 든다. 요즘은 농촌이나 도시에서도 아이들의 울음소리나 함성을 듣기가 어렵다. 농촌에는 젊은 사람들이 아이들 교육과 생계를 위해 이농을 하고, 도시에서는 유치원생부터 학원이라는 몹쓸 병에 걸려서 동네에서도 아이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학교에 가도 요즘 아이들은 밝은 함성 대신 너무 일찍 어른들 흉내를 내며 자라고 있다.

얼마 전 손자의 유치원 학예 발표회에 가보고 깜짝 놀랐다. 꼬마들의 발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른들의 흉내였다. 물론 깜찍하고 귀여워서 박수를 힘껏 보냈지만 아쉬움이 많았다. 꼬마들이 어른들의 음악에 맞춰 엉덩이춤을 신나게 추었다. TV에서 본 어른들의 몸짓 그대로였다. 꼬마들이 입은 옷도 알몸을 드러내는 반짝거리는 가수들의 옷과 비슷했다. 표정도 티 없는 맑은 웃음이 아니라 깜찍한 어른들의 흉내였다. 지금쯤은 꼬마들이 동심의 뜰에서 자유롭게 뛰놀 수 있어야 할 텐데 아이들은 단지 부모의 뜻에 따라 길들이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아이답지 못하면 겉 늙어버리고, 끓지 않고 넘쳐버리면 학업보다 더 중요한 인성교육에 큰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대부분 학부모의 욕심은 인성교육 같은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우선 SKY대학 입학에 맞추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기의 머리맡에 ‘SKY’라고 써 붙인다는 농담 같은 이야기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의 창의성, 자주능력 등은 허울 좋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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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제4차 산업혁명, 즉 인공지능시대의 주역으로서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항상 ‘왜?’하고 의문을 제기할 줄 아는 비판적 사고를 길러줘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꿈과 창의성을 살리는 길은 지금까지 한 줄로 세우는 서열교육보다 개성에 따른 개별화 교육, 즉 여러 줄로 세우는 교육과 아이들을 아이답게 키워야 하는 일이다. 개성 있고 꿈 많은 아이에게 나름대로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갖도록 환경을 설정해 주고 ‘자유놀이 재량활동시간’을 활용한 행사를 의도적으로, 그리고 다양한 방과 후 활동 등을 통해 조잡스럽고 서툴더라도 아이들의 생각과 꿈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게 해 사라져가는 개성과 창의성을 찾아 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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