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용서?
피해자가 용서할 때까지 기다려야

예수님의 으뜸 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씩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매 순간 용서를 강요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 말씀을 모든 상황,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이 상황은 베드로의 형제가 베드로에게 잘못한, 지극히 개인적인 상황인데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상황에까지도 모범 답안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된 지 얼마가 되었다고 벌써 사면, 용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저에게는 개소리처럼 들리고,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멋대로 평가 절하시키는 사람들을 위해 지옥이 있다는 걸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재판도 받지 않았는데 그리고 세월호 유족들이 아직도 오열하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용서를 들먹일 수 있으며 세월호를 지척에 두고도 가족을 찾지 못해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구는 유족들이 있는데 누가 감히 용서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용서를 아무나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하라고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아닙니다. 상황이 다르면 메시지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베드로가 형제 운운하며 말하는 용서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을 용서하는 것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상황이고, 용서의 질 또한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들을 무시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는 것은 코걸이를 귀걸이라 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용서하는 것입니까? 가해자입니까? 피해자입니까? 가해자가 피해자를 앞설 수 없는 것이 용서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용서를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용서가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이고,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것이라 하더라도 용서의 기본은 무조건 용서해야 하는 것일 텐데 개인적인 용서도 어렵지만 사회적인 용서는 더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실천할 수도 없는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까?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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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조건'에 초점을 두기 때문인데 만약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내가 나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용서하고 자시고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내가 형제의 잘못을 없애 주거나 아니면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내려놓는 것, 내가 나를 죽이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를 완성하셨습니다.

지금 교회력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절인데 내가 먼저 나를 내려놓음으로 형제와 화해하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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