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산 : 너른 땅 굽어살피는 ‘공룡 같은 산’
김해의 산 : 찬란한 가락국의 뿌리

너른 땅 굽어살피는 '공룡 같은 산'

고성의 산

소가야(小加耶)의 수도 고성군은 먼 옛날 '공룡 나라'였다. 1억 년 전 중생대 이 땅을 지배했던 공룡의 주무대가 고성이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공룡 발자국 화석만 5000여 족에 이른다. 고성은 미국 콜로라도, 아르헨티나 서부 해안과 더불어 세계 3대 공룡 발자국 화석 산지이며 중생대 새 발자국 화석지로는 세계 최대다.

지리적으로 해안가에 위치한 고성의 산은 높이보다 풍성한 산세와 조망이 아름답다. 사시사철 풍요로운 바다와 너른 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상에 서면 세파에 찌든 몸과 마음이 위로를 받는다. 고성평야와 당항만·당동만을 굽어보는 거류산은 정상부 모양이 스위스 알프스 마터호른봉을 닮았다고 해서 '한국의 마터호른'으로 칭한다. 고성 사람은 고성평야의 지기(地氣)와 명산 거류산의 정기(精氣)가 합쳐져서 고성에서 걸출한 인물이 많이 난다고 믿고 있다. 세계 최초로 8000m급 16좌를 모두 등정한 세계적인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바로 고성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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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류산 정상에서 바라본 고성군 거류면과 당동만. / 유은상 기자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창건한 옥천사를 품은 연화산은 고성에서 유일한 '산림청 선정 대한민국 100대 명산'이다. 사량도가 떠 있는 자란만을 조망할 수 있는 무이산도 고성의 명산으로 손색이 없다.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의 선몽으로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천 년 고찰 문수암이 무이산의 가치를 더 빛나게 한다.

'고성 가서 인물 자랑 말라'는 옛말이 있다. 고성 사람은 이 이야기의 근원에 땅의 힘, 산의 힘이 있다고 말한다. 높지는 않지만 푸근함과 영험함이 어우러진 산이 '공룡 나라' 경남 고성 땅에 있다.

지리산서 뻗은 산줄기 사방 흘러 터전 안았네

고성이 한눈에 보인다는 거류산, 정상에 오르고 보니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너른 들판이다. 그리고 들판을 가로지르는 물줄기. 고성 땅에 기원전부터 사람이 제법 모여 살아왔다더니 과연 그럴만하게 풍성했겠구나 싶다. 여기에 바다를 끼고 있으니 쇠를 만들어 수출하던 고대 국가의 중심지로도 손색이 없다.

고성을 둘러싼 산세는 험준하진 않으나 풍성하다.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13개 정맥 중 낙동강 남쪽으로 이어지는 낙남정맥(洛南正脈)과 그 줄기가 고성 땅을 두루 감싸고 지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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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읍에서 바라본 무량산(왼쪽 높은 봉우리). 산줄기가 흘러내려 이곳 사람들의 터전이 되었다. / 유은상 기자

옛 지도로 본 고성 산

우리나라 산맥을 잘 표현한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를 보면 백두대간의 끝자락, 지리산에서 뻗어나온 산줄기가 동남쪽으로 흘러 진주, 하동, 사천을 지나 고성에 이른다. 고성 땅을 지키는 진산(鎭山)은 무량산(無量山·542m)이다.

낙남정맥은 무량산에서 고성 땅을 고즈넉이 내려다본 다음 북쪽으로 천왕산(天王山·581m)으로 이어진다. <대동여지도>에는 천왕점(天王岾)이라 적혀 있다. 점(岾)은 높은 산의 마루를 이른다.

천왕산을 고성의 주산(主山)으로 보는 옛 기록이 더러 있다. 낙남정맥이 계속해 북쪽으로 고성과 마산의 경계를 이루는 적석산(498m)으로 향해 가는 동안 서쪽으로 가지가 하나 뻗는데 그곳에 고찰 옥천사를 품은 연화산이 솟아 있다. 다시 무량산으로 돌아와 서남쪽으로 향하면 무이산(549m)이 우뚝하다. 신라 의상대사가 금산을 가려다 관세음보살이 꿈에서 일러준 대로 무이산을 찾고는 크게 감동해 문수암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요즘 지도를 보면 무이산은 수태산(570m), 향로봉(479m)과 함께 고성의 서남부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무량산에서 동남쪽으로는 고성읍을 지나면 남산(南山)이 나오는데 고성 땅의 안산(安山)으로 보면 된다. 남산은 지금의 남산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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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류산성 너머 고성평야와 멀리 사량도 쪽 바다가 보인다. / 유은상 기자

남산에서 이어진 산줄기는 벽방산(651m)으로, 다시 거류산(571m), 구절산(559m)으로 이어진다. 벽방산은 지금 고성과 통영의 경계로 주봉이 통영에 속한다. 그래서 통영시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소개된다. 하지만, 통영이 고성에서 분리되기 전까지는 고성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다. 그래서 고성 사람들이 기우제를 벽방산에서 지냈다고 옛 기록은 전한다.

대부분 옛 지도에서 거류산을 유민산(流民山)으로 적고 있는데, <1872년 지방지도>는 거류산으로 돼 있다. '거류산은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이라는 기록이 있다.

되찾은 진산 무량산

지난 2014년 4월 4일 국토지리정보원은 지명 변경 고시를 하나 발표한다. 이때 산봉우리 4개가 이름이 바뀐다. 천왕산, 무량산, 철마봉, 서재봉이다. 이전까지 천왕산은 무량산으로, 무량산은 대곡산으로, 철마봉은 철마산으로, 서재봉은 천황산으로 불리었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 일제가 지도를 만들면서 바꾼 이름을 계속 써 온 것이었다. 명산에 쇠말뚝을 박은 것처럼 일제는 조선 땅의 정기를 끊고자 지명을 바꾸기도 했다. 2013년 고성문화원 향토사연구소는 일제 강점기에 바뀐 이름을 바르게 고쳐달라고 국토지리정보원에 건의했다.

옛 기록들은 한결같이 고성현에서 서쪽으로 10리에 무량산이 있고, 15리에 천왕산이 있다고 적고 있다.

이를 토대로 문헌들을 살펴보면 대곡산이 무량산이고, 무량산이 천왕산이어야 앞뒤가 맞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름을 되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이전 이름을 알고 낙남정맥을 찾는 이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 그런데 남해나 함양 같은 고을과 달리 고성은 읍치(현 고성군청 자리)에서 진산까지 거리가 제법 멀다. 진산치고는 접근성이나 활용성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고성문화원에 물어보니 실제 진산 노릇을 한 봉우리는 현에서 10리나 먼 무량산 정상이 아니라, 4리 정도 떨어진 철마봉이었다. 무량산에서 뻗어나온 줄기는 오똑한 철마봉(417m)과 서재봉(193m)을 지나 고성벌판으로 내려선다. 고을 현령은 1년에 두 번 철마봉에서 제를 지낸 후 무량산에서 제를 지냈다고 기록했다.

무기산과 기생 월이

<대동여지도> 등 여러 옛 지도에 읍치 북쪽에 무기산(舞妓山)을 표시하고 있다. 고려시대 고성 수령인 고주자사(固州刺史)가 기생을 데리고 이곳에서 춤추고 놀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헌에서 2리 정도 떨어진 야트막한 동산이고, 무덤 위에 밥그릇을 엎어놓은 것 같은 무덤이 있다고 해서 '독뫼산'이라고도 불리던 곳이다. 바로 고성읍 송학리에 있는 가야시대 유적 '송학동 고분군'을 말한다. 아마도 옛날에는 고분이라기보다는 독특한 언덕 정도로 생각하고 고을 수령이 기생을 데리고 위에서 놀았던 것 같다. 물론 마을 주민들도 농사가 끝나면 고분군의 널찍한 장소에 모여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 이 무기산 앞에는 무기정(無妓亭)이란 술집이 있었다. <해동지도>에 거의 동헌과 비슷한 크기로 그려 놓은 것으로 봐서 꽤 유명했거나 중요한 곳이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 이 무기정 주변 주막에 있었다는 기생 월이 이야기를 고성문화원에서 만난 정해룡(사진) 시인에게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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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해룡 시인. / 유은상 기자

정 시인이 태어난 곳이 바로 이 무기정 주변이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게서 기생 월이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배경은 임진왜란이다. 전쟁을 일으키기 전 일본은 밀사를 파견해 조선 해변 지도를 수집했다. 부산에서 시작해 남쪽 해변을 탐색하던 밀사가 고성에 도착해 무기정에 묵게 됐다. 이때 월이란 기생이 밀사가 수상한 것을 눈치채고 그가 곯아떨어진 사이 그의 품에서 해안 지도를 발견한다. 그리고 당항포에서 고성 앞바다에 이르는 가짜 바닷길을 그려 넣는다. 이 지도가 이후 이순신 장군이 당항포해전을 승리로 이끈 남모르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주민들 사이에 구전하는 전설이다.

동서남북 다른 고성 거류산 '천의 얼굴' 보여주네

고성군은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은 지형이다. 높은 곳은 대부분 산지이며 낮은 곳은 고성평야 등 바다로 향하는 너른 들이 자리하고 있다.

온화한 날씨와 풍족한 바다, 넓은 평야 등 고성은 사람 살기 좋은 최고의 조건을 갖췄지만 굳이 아쉬운 점을 하나 꼽자면 높은 산이 적은 점이다.

3면이 바다와 맞닿은 지형적인 영향으로 600m 이상의 산은 없다. 그중 천왕산(581m), 수태산(571m), 거류산(571m), 구절산(559m), 무량산(542m), 연화산(524m) 등이 높은 산으로 분류된다. 그렇지만 고성 산은 높이에 따른 평가를 거부한다. 특히 거류산이 그러하다. 거류산은 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꼭 가봐야 할 명산으로 꼽힌다.

걸어가는 산

"산이 걸어간다."

먼 옛날 저녁 무렵 밥을 짓던 한 할머니(또는 처녀)가 산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을 보고 부지깽이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랬더니 산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고 한다. 걸어가는 산이라 해서 '걸어산', '거리산'이라고 했고 이는 나중에 거류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문헌에는 가야시대 태조산, 조선시대 유민산으로 사용되다 조선 후기 거류산으로 바뀐다.

거류산은 고성군 거류면 당동리에 있다. 서쪽은 고성평야, 북쪽은 당항만, 동쪽은 당동만을 끼고 남으로는 통영과 경계를 이루는 벽방산과 이어져 있다. 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은 산으로 도내에서는 흔하지 않은 유형이다. 이러니 사람들 눈에는 산맥에서 떨어져나온 산이 고성평야를 지나 바다로 걸어가다 멈춰 선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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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마터호른’이라 불리는 거류산. / 유은상 기자

거류산은 알프스 3대 북벽 중의 하나인 마터호른처럼 정상이 뾰족하게 생겨 '한국의 마터호른'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단순히 생긴 것만 비슷하다면 별명은 오래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어울리는 뭔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반전의 묘미다. 거류산은 아래에서 보면 그냥 평범한 산이다. 그러나 오르면서 하나하나 그 가치를 확인하게 된다. 기암, 청송, 산성, 소사나무, 전설, 진달래, 산행 묘미, 확 트인 전망 등이 그것이다. 571m의 높지 않은 산이 웬만한 장점은 다 가진 셈이다.

여기에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요즘 말로 '가성비'까지 갖췄다. 다시 말해 크게 힘들이지 않고 산에 오르면서도 투자한 시간과 노력 이상의 만족감을 준다.

거류산은 계절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일 뿐 아니라 보는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른 전망을 선사한다. 고성평야, 당항포, 통영과 사량도 쪽 다도해 전망 모두 색다르다. 특히 정상에서 당동만을 바라보면 가슴이 확 트인다. 큰 활주로 같은 당동만 그 푸른 물결은 마주하자마자 보는 이의 가슴을 열어젖히고 쓰나미처럼 확 밀려든다. 당동만에 발을 담근 인근 마을과 다랑논도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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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류산 표석과 소사나무. / 유은상 기자

정상 아래에는 서쪽 경사면을 성내로 해 축조된 거류산성(경남도 문화재자료 제90호)이 있다. 둘레 1.4㎞, 높이 3m, 너비 4m가량의 규모로 현재 성벽은 600m가량 남아 있는데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성벽은 자연 암반의 절벽을 이용해 그 사이에 돌을 쌓은 형태다. 성안을 서쪽으로 둔 것으로 보아 동·남·북쪽을 경계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소가야 때 신라를 경계하고자 만든 성이라는 설이 있지만 성곽의 형태와 출토된 유물을 살펴보면 신라 말 또는 고려 초 성곽으로 추정되며, 왜구 침략 방어용으로 짐작된다.

산 정상 소사나무(자작나뭇과)도 거류산 명물이다. 표석 바로 아래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소사나무. 그 모습 자체가 살아 있는 석부작 분재 작품이다. 이 나무는 수령이 300년가량 된 것으로 전해진다. 모진 비바람과 척박한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는 생명력이 경이롭다.

정상에서 감동마을 방향으로 하산하는 길에 만나는 거북바위도 볼거리다. 8분 능선에 있는 바위는 문암산에서 바라보면 영락없이 거북이 한 마리가 정상을 향해 오르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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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류산 거북바위. / 유은상 기자

등산로 초입에 있는 엄홍길전시관도 거류산을 찾은 사람들은 꼭 들른다. 고성 출신인 산악인 엄홍길의 세계 고산 16좌 완등을 기념하고자 2007년 개관했다.

전시관은 1만 7347㎡ 터에 664㎡ 규모의 단층 건물이다. 산 사나이 엄홍길과 고성 명산을 알리는 코너 등 5개 존으로 구성돼 있으며, 16좌 완등에 사용했던 텐트와 산소마스크 등이 전시돼 있다.

거류산은 감동마을, 당동마을 등에서 오르는 여러 코스가 있다. 엄홍길전시관에서 출발해서 하산하는 길이 대표적이며, 긴 코스지만 4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고성 연화산 시원한 계곡·고즈넉한 숲 '일품'

고성 하면 연화산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산은 경남을 대표하는 도립공원으로 1983년 지정됐다.

연화산 이름은 조선 인조 때 승려 학명이 쓴 고기(古記)에 '높이 선 산세에 연꽃이 핀 듯하다'고 기록된 데에서 유래했다.

산 자체도 모자람이 없지만 더욱 유명해진 데는 옥천사의 명성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연화산 계곡 중간, 연꽃으로 치면 꽃송이 한가운데 자리 잡은 옥천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대웅전 왼쪽에 달고 맛있는 샘물이 있어 이렇게 불렸다. 전설에 의하면 샘물에서 매일 공양미가 흘러나왔고 한 스님이 더 많은 공양미를 얻고자 바위를 깨트리면서 더는 물과 공양미가 나오지 않았단다. 그 뒤 노스님의 기도로 다시 약이 섞인 샘물이 솟고 그 자리에 연꽃이 피었다고 전해진다.

샘물 외에도 옥천사에는 불교의식 때 사용하는 징처럼 생긴 청동북(보물 495호)과 대웅전을 압도하는 화려한 자방루(경남도 유형문화재 53호)도 특색 있다.

무엇보다 연화산은 시원한 계곡과 고즈넉한 숲이 좋다. 특히 옥천사 뒤편 오래된 소나무숲은 눈과 가슴을 싱그럽게 한다. 그러니 등산보다 산책이 더 어울리는 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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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화산 숲길. / 유은상 기자

찬란한 가락국의 뿌리

김해의 산

고대국가 가락국(금관가야·본가야)의 옛 도읍지 김해는 풍요의 땅이다. 대자연과 사람의 힘으로 함께 만들어낸 김해평야는 영남권 최대의 곡창지대로 경남에서 가장 너른 들판이다. 풍요의 상징인 너른 들녘이 있었기에 김해는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더불어 철기문화가 가장 융성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김해의 시작은 산이었다.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나 나라를 세웠다는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산이 바로 구지봉(龜旨峰)이다.

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과 그의 오빠 장유화상의 전설이 서린 발자취도 '김해의 3대 명산'으로 불리는 신어산과 무척산, 불모산에서 찾을 수 있다. 김해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무척산(無隻山·702m)은 다양한 형상의 바위와 산정호수, 흔들바위, 연리지 등이 유명하다. 은하사와 동림사를 품은 신어산은 그 이름만큼 수많은 전설과 신화를 간직한 산이다.

김해의 산은 사람과 들판을 품고 있다. 동·북·서쪽으로 발달한 산악 지형이 동남쪽으로 펼쳐진 광활한 김해평야를 에워싼 형국이다. 차디찬 바람을 산이 막아주고 낙동강의 마르지 않는 물, 쏟아지는 햇살 등 이보다 더 좋은 생명의 땅이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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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벽을 이룬 무척산 탕건바위에서 바라본 전경. 생림면 들녘과 낙동강, 멀리 밀양 하남들판이 순서대로 다가온다. / 유은상 기자

수로왕의 전설 굽이굽이 내려오는 김해 산

김해를 둘러싼 산은 대체로 용, 호랑이, 거북을 닮았다. 구지봉을 포함해 임호산, 용지봉, 석룡산, 반룡산 등이 그렇다. 풍수에서는 이 세 짐승 모두 임금을 상징하는 기운을 담고 있다고 본다. 산세만으로도 김해는 큰 임금이 날 땅인 셈이다. 첫 큰 임금이 바로 가락(가야)국의 시조이자 오늘날 김해 김씨의 시조이기도 한 김수로왕이다. 김해 산 이야기는 지리산에서 시작한 낙남정맥의 끝, 분성산에서 시작한다.

옛 지도로 본 김해

조선시대 지도를 살펴보면 김해 고을의 진산(鎭山·고을을 수호하는 주산)은 분성산(盆城山·327m)이다. 당시에는 분산(盆山) 혹은 산성봉(山城峰)으로 기록됐다. 분산에서 줄기가 뻗어 구지봉(龜旨峰·200m)을 이뤘다. 대부분 조선시대 지도에 구지봉 자락에 있는 허후릉(許后陵·수로왕비릉)과 이곳에서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수로왕릉을 명확하게 표시하고 있다. 고을의 중심이 되는 읍치(邑治)는 수로왕릉, 구지봉, 분성산 줄기로 둘러싸인 곳에 있다. 당시 지도에는 분성산에서 두 줄기 하천이 흘러나와 바다로 향한다. 읍치를 동쪽으로 끼고 흐르는 것은 지금의 해반천이다. 또 하나, 읍치를 가로지르는 하천은 현대에 들어 복개되어 이제는 볼 수가 없다.

고을 서쪽 아래 류민산(流民山)이 표시된 지도가 많은데, 오늘날 임호산(179m)을 말한다. 고을 성곽 동남쪽 아래로 내삼태(內三台), 외삼태(外三台)로 표시된 조그만 봉우리 6개가 보이는데, 오늘날 어느 것을 가리키는지 알기 어렵다. 분성산을 포함한 고을 전체 지역을 신어산(神魚山)과 식산(食山) 줄기가 감싸고 있다. 식산은 지금의 무척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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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분성산 분산성에서 바라본 김해 시가지 전경. 분성산에서 구지봉으로 이어져 내려간 산세를 중심으로 고대 금관가야의 찬란한 문화가 꽃피었다. 20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이곳은 여전히 많은 사람이 터전을 이루고 살고 있다. / 유은상 기자

분산성이 있는 김해 진산, 분성산

분성산 혹은 분산의 '분(盆)' 자는 '바리'라는 우리말을 발음 그대로 한자로 옮긴 것으로 본다. 그래서 분산은 '서쪽에 있는 산'이란 뜻이다.

분성산이라는 이름으로 보면 분명히 분성(盆城)이 있어야 하는데, 분산성(盆山城)이 있다. 돌로 쌓은 분산성이 아닌 흙으로 쌓은 분성이 따로 있지 않았나 생각하는 연구자도 있다. 이 두 성을 혼동해 후세 사람들이 분산을 분성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고산자 김정호가 쓴 조선 지리서 <대동지지>(1864)에는 석성(石城)인 분산성과 토성(土城)인 분성을 따로 적어 놓았다. 토성을 쌓은 건 수로왕이라고 한다. 분산성은 따로 김해산성이라고도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분산 위에 토성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어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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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산성 봉화대. / 유은상 기자

어쨌거나 분산성이라는 석성이 조선시대에도 분성산 위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분성산성지도'가 있어 당시 성이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었는지 자세히 알 수 있다. 지도를 보면 성곽 내부에는 우물과 연못, 창고 등이 갖춰져 있어 명실 공히 군사기지 노릇을 제대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주의 중심, 신령한 거북, 구지봉

수로왕이 알에서 태어난 구지봉(龜旨峰). 조선시대에는 구지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대부분 거북을 닮아서 거북 구(龜) 자를 쓰는 것이라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글자를 더 분석해보면 이곳이 수로왕이 태어날 당시 사람들이 신성시했던 땅 자체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구(龜)는 지모신(地母神)을 상징하는 옛 우리말 발음을 한자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지모신은 대지 곧 모든 생명을 잉태하는 땅을 어머니로 여기고 숭상하는 것을 말한다. 구지의 지(旨)는 중심을 뜻하는 옛 우리말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하여 어머니 대지신의 중심지란 뜻으로 구지(龜旨)라고 적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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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로를 내면서 잘렸던 거북의 목 부분과 몸통 산세를 이으려 만든 구지봉 터널. / 유은상 기자

구지봉이 거북 모양에서 나온 말이란 것은 <삼국유사>에 처음 나온다.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형세론적인 분석이다. 산의 생김새를 보고 길흉화복을 판다는 것이다. 거북은 용, 봉황, 기린과 더불어 예로부터 신령한 동물로 여기고 있다. 대체로 수로왕비릉이 있는 곳이 거북 몸통으로, 구지봉을 거북 머리로 본다. 김해 주산인 분성산에서 뻗어나온 정기가 거북 머리가 있는 구지봉에 맺혔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구지봉을 지나 마산으로 가는 도로공사를 하면서 몸통과 머리가 연결된 목 부분을 잘라 버렸다. 이후 1980년대 말 거북의 목을 연결하자는 김해 김씨 문중의 건의를 받아들여 김해시는 1992년 도로 위에 터널을 만들고 흙을 5m 정도 덮어 수로왕비릉에서 구지봉으로 오가는 길을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차들이 거북이 목으로 지나다닌다.

입 막아 길들인 호랑이, 임호산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부산을 오가는 길에 보이는 임호산(林虎山). 이름 그대로 호랑이를 닮은 산이다. 조선시대에는 가조산(加助山) 혹은 부민산(富民山)으로 불렸다. 당시 민간에서는 류민산(流民山)으로 부르기도 했다는 기록이 많다. 많은 조선시대 지도가 류민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가락국 9대 겸지왕 시절 류민공주(流民公主)와 관련한 슬픈 사랑 이야기가 서린 곳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그런데 이 산 모양새가 옛날부터 편안하지 못 했나 보다. 마치 호랑이가 고을 쪽을 돌아보며 입을 크게 벌리고 위협하는 듯해 악산(惡山)이라거나 호랑이 호(虎)를 붙여 호구산(虎邱山), 임호산으로도 많이 불렸다. 이 중 가장 많이 불린 이름이 임호산이다.

가락국 장유화상(화상은 승려라는 뜻)이 호랑이의 벌린 입 부분에 절을 세워 그 기운을 눌렀다고 한다. 현재 임호산 중턱에 있는 흥부암이다. 지금도 흥부암 대웅전 주춧돌을 받친 게 호랑이 석상이다. 그만큼 철저하게 거친 기운을 잠재우려 애쓴 것이다. 장유화상은 흥부암을 짓고는 당시 산 이름을 안민산(安民山)으로 고쳤다고 한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산이란 뜻이다. 흥부암이란 이름도 독특하다. 호랑이 입을 막고서는 흥부암(興府庵)이라고 했다. 김해부(府)를 흥하게 할 암자라는 뜻이다. 김해 사람들은 이렇게 오래전부터 큰 호랑이를 길들여 마을을 지키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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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랑이가 입을 크게 벌리고 마을을 위협하는 듯한 형세의 임호산. / 유은상 기자

신성한 두 마리 물고기, 신어산

신어산(神魚山·630m)은 분성산 너머에서 신(神)처럼 우뚝하니 솟아 김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신어(神魚)는 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의 출신국 아유타국의 상징이다. 수로왕릉 정문을 포함해 은하사, 합천 영암사, 요즘에는 김해 시내 곳곳에서도 볼 수 있는 물고기 두 마리, 즉 쌍어(雙魚)를 말한다. 쌍어는 가락국의 상징이기도 하다. 또 신라 왕족의 허리띠에도 물고기 장식이 있다.

페르시아 신화에서 신어는 카라(Kara)라고 불린다. 이 말에서 가야, 가락이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신어는 페르시아인들이 숭배하던 큰 나무 '고 케레나'를 수호하는 일을 한다. 이 나무는 인간의 병을 고치거나 새로운 생명을 준다고 한다. 신어가 있는 곳이 곧 인간을 보호하는 신령스러운 장소다. 그래서 신어산은 옛 김해, 즉 가락국 사람들이 신성시하던 산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불교에서도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고 항상 깨어 있기에 수행자의 상징 혹은 부처를 수호하는 신물로 여겨진다. 2000년 전 저 멀리 페르시아에서 헤엄쳐 온 신어가 지금까지 김해 사람들을 지켜주는 것이다.

기암괴석 뿌리내리고 산정호수 품은 무척산

김해는 사실 산보다 강과 평야가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꼭 그렇지도 않다. 김해는 3면이 산에 둘러싸여 있다. 동·북·서쪽으로 발달한 산악지형이 동남쪽으로 열린 김해평야를 품고 있다. 첩첩산중 높은 산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만만하지도 않다. 높은 산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녔을 뿐 아니라 가야 고도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니 김해에서 산을 오르는 것은 등산이 아니라 역사나 전설 속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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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무척산 모은사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서 바라본 풍경이 시원하다. / 유은상 기자

비교를 거부하는 산

김해 산을 두고 인기투표를 하면 무척산(無隻山·702m)이 가장 많은 표를 얻을 것이다. 우선 김해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동시에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와 산정호수, 낙동강을 내려다보는 시원한 풍광, 흔들바위, 연리지 등 많은 볼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척산은 신어산, 불모산과 함께 김해 3대 명산에 꼽힌다.

무척산은 김해시 생림면 봉림리와 상동면 여차리에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식산(食山)으로, <조선지지자료> 등에는 무척산으로, <여지도서>에는 무착산(無着山)으로 표기돼 있다.

무척산의 한자 뜻을 풀자면 '한 쌍이 될 수 없는', '견줄만한 게 없는', '기대지 않는' 등의 의미다. 그만큼 아름다울 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독보적인 산이라는 뜻이다. 식산이란 이름은 '밥상을 차려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불리게 됐다는 설과 '북풍을 막아주고 낙동강 물줄기를 끌어들여 고을을 먹여 살리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설이 있다. 무착산은 불교적인 의미에서 '집착하지 않는 산'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밖에 무쌍산(無雙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사실 무척산은 경남의 산이지만 김해 시민을 제외하면 경남보다 부산 사람에게 더 유명하다. 멀지 않고 높지 않아 주말이나 휴일 큰 부담 없이 산행의 묘미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고성의 거류산이 그랬던 것처럼 산의 높이가 명성, 만족도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산이다.

산정호수 '천지'

무척산은 산정호수를 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산과 비교를 거부한다. 규모만 작을 뿐 백두산 '천지'와 이름도 같고 생긴 것도 닮은꼴이다. 일반적으로 산에 포함된 호수는 산 아래 계곡을 막아 만든 것이지만 무척산 천지는 산 정상부(505m)에 있다. 백두산 천지, 한라산 백록담과 함께 우리나라 산정에 있는 3개 호수 중 하나라고 알려졌다. 다만, 백두산과 한라산은 화산이 폭발하면서 발생한 것이지만 무척산 천지는 정상 아래 분지에 물이 고여 생긴 것이다.

면적은 6700㎡, 저수량은 7300여t에 이른다. 둘레가 대략 300m라 생각하면 크기를 짐작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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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정호수 ‘천지’. / 유은상 기자

산 오르는 것이 힘들어질 때쯤 만나게 되는 '천지'. 한 잔의 시원한 청량음료와 같은 느낌이다. 산을 찾았을 뿐인데 호수의 정취도 느낄 수 있고, 그 속에 담긴 전설이라는 보너스도 받게 된다.

전설에는 가락국 시조 수로왕이 붕어(崩御·임금이 세상을 떠남)한 뒤 국사가 천제를 올리고 열흘 만에 현재의 서상동 묏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왕릉을 만들고자 땅을 파니 계속 물이 나와 못처럼 되었다고 한다. 물길을 잡고자 여러 수단을 써도 허사였다. 모두 걱정을 하는데 신보(申輔·허 왕후를 따라 아유타국에서 온 신하)가 고을 가운데 가장 높은 산에 못을 파면 해결될 것이라 했다. 그의 말을 따르니 물이 그쳤고 무사히 국장을 치를 수 있었다고 전한다.

곳곳에 아기자기한 볼거리

무척산을 오르는 이들은 대체로 주차장∼모은암∼천지∼정상∼흔들바위∼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서쪽 능선 코스를 선택한다. 3시간가량이면 충분하며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면 먼저 모은암(母恩庵)을 만나게 된다. 모은암은 수로왕 맏아들 거등왕(2대왕)이 어머니 허 왕후 은혜를 기리며 지었다는 전설과 허 왕후가 인도의 어머니를 그리며 지었다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온다.

암자 주변에는 수직으로 솟은 기묘한 바위가 즐비하다. 미륵바위, 백호바위, 어머니바위, 약사바위, 장군바위, 청룡바위 등 생김새가 다른 바위들이 시선을 잡는다. 다양한 바위를 보면서 그 사이로 지그재그 오르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척산은 연리지로도 유명하다. 모은암 뒤쪽으로 오르는 길에는 연리지 소나무를, 정상에서 흔들바위 쪽으로 하산하는 바위에서는 삼쌍 연리목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연리지 소나무는 6m가량 높이에서 가지를 합치고 있어 그 모습이 신기하게 함께 가자며 어깨동무하는 것처럼 보인다.

낙동강을 굽어보는 전망도 일품이다. 정상 신선봉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나무에 가려져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다. 대신 산을 오르내리는 동안 커튼처럼 젖혀진 숲사이로 틈틈이 마주하는 전망에 가슴도 따라 열린다.

1940년 일제에 항거한 목사들이 만든 천지 옆 무척산교회(기도원)와 하산길에 있는 흔들바위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노무현 전 대통령 나고 자란 봉화산

진영에 있는 봉화산도 예로부터 명산으로 꼽혔다.

산의 위치와 형세, 그 기운이 예사롭지 않은 곳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산 아래 마을에서 대통령이 나면서 명산임이 확실히 입증됐다.

해발 140m 산이 봉화산(烽火山)으로 이름 붙여진 데는 봉화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 아래 마을도 봉화산 밑에 있어 봉하(烽下)마을이 됐다.

나지막한 산이 어떻게 봉화대 역할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주변이 낙동강과 평야에 둘러싸인 까닭에 인근에서는 제일 높은 산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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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산 모습. / 유은상 기자

그러니 전망 또한 만만치 않다. 정상인 사자바위에서는 봉하마을과 진영읍 방향이 시원하게 보인다. 반대쪽 호미든 관음상 쪽에서는 넓은 들판과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조망할 수 있다. 또 이 산에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투신한 부엉이바위, 정토원, 마애불 등도 자리를 잡고 있다.

사실 봉화산은 고 노무현 대통령을 떼어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노 전 대통령이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고, 2008년 2월 퇴임 후 낙향해 지내다 2009년 5월 유명을 달리한 곳이다. 산은 대통령의 기쁨과 슬픔을 지켜보고 또 함께했다.

마을에는 생가와 퇴임해 지냈던 사저, 서거 후 모셔진 사자봉 아래 대통령 묘역과 추모의 집 등이 있다.

지금도 산과 마을에는 노 전 대통령 흔적을 쫓아 방문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유년시절, 그리고 낙향 후 즐겨 찾았던 봉화산 나무와 바위 하나에도 노 전 대통령의 이야기가 담겨 전해지고 있다. 무척산에 얽힌 수로왕 전설처럼 수백 년 수천 년 뒤 봉화산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이야기가 남아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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