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에는 거제가 있다 2

거제의 옛 도읍을 벗어나 왼쪽으로 호수처럼 잔잔한 만의 노을을 끼고 둔덕면 쪽으로 길을 잡는다. 겨울 전지 훈련장으로 인기 높은 스포츠 파크를 지나고 가을 섬꽃 축제로 온통 꽃으로 뒤덮이는 들판에 대형 식물원 돔이 바닷가에 섬처럼 떴다. 외간리 동백나무를 찾아가는데 들 가운데서 길을 잃었다. 이럴 때 참 난감하다. 도시에서 길을 잃었다면 지나가는 이를 붙잡고 물어본다지만 산이나 들에서는 우선 눈에 띄는 사람이 없다. 혹 있더라도 들일 산일에 바빠 한가로이 물을 틈이 없다. 하지만 어찌하겠나 염치 불고하고 가까이 사람 소리 들리는 비닐하우스로 들어갔다. 어째 분위기가 스산하다. 땅에서든 물에서든 값이 있건 없건 거둘 때는 소리 나마 흥을 내건만 무슨 땅콩 같기도 하고 생강처럼 생긴 것을 수확하기는 하는데 사람들이 말이 없다. 비닐은 찢어지고 잡초가 우거졌다. 감히 길 물음은 못하고 애먼 물음을 던진다.

"욕들 보십니더. 이기 머시라예?"

"모리고 찾아온 것도 아이낀데 복장 디비는 소리 말고 가 갈라모 한 소쿠리 캐 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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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달섬. / 박보근 노동자

뜻밖의 불퉁스런 지청구에 당황하여 말을 입에 물고 우물우물 외간리 동백나무 가는 길 물음을 하니 그제야 고개를 들어 입성을 보고 들일 보러 나온 사람이 아닌 줄 아셨나 보다. 이게 카레의 재료로 알고 있는 울금이라는데 강황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단다. 이것도 신현과 고현처럼 두 가지 이름을 가진 하나이다. 같은 식물인데 땅속줄기 부분은 강황이라 하고 거기서 자라나와 덩이뿌리를 이룬 부분을 울금이라 한다. 그런데 수확하는 이들이 하나둘씩 여기저기 흩어져 작업하고 있다.

"마, 내 이것들만 보모 속에 천불이 나서 이우지 불러 캐 가라 했다."

이 들에서 파인애플 농사를 처음 지었다는 하우스 주인의 한숨이 길다. 계약 재배로 울금을 심었는데 수확 시기가 되자 연락이 되지 않는단다. 시장에 나가보니 가격이 폭락하여 수확 인건비도 건질 수 없어 갈아엎기 전에 이웃에게 알려 캐 가라고 했다. 건너편 섬꽃 축제장을 바라보며 그냥 다 들어내고 유채나 코스모스 씨앗이나 들어부어 놓았다가 봄 가을 지나는 관광객들에게 입장료나 받고 사진이나 박아 주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한다.

밀, 보리가 사라진 지는 오래이며 이제 나락마저 빼앗기고 이름조차 생경한 것들로도 채울 수 없어 먹을거리를 생산하지 못하는 들판이 서글프다. 논길 끝까지 나와 길 일러 주신 대로 찾은 마을 뒤 언덕에서 들과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동백나무 두 그루. 부부 동백으로 불리는데 수령을 300년 넘게 보고 있다. 안내문에는 효령대군 9대손 이두징이 이곳에 입향한 기념으로 심었다고 적혀있다. 마을에 혼사가 생기면 대나무와 이 동백나무 가지를 혼례상에 올려 절개와 금슬과 무병장수를 빌었다고 한다. 3월에 꽃이 활짝 피었을 때 북쪽에 꽃이 많이 피면 비가 많이 오고 남쪽으로 몰려 피면 흉년이 들고 동쪽과 서쪽에 많이 피면 풍년이 들며 골고루 피어나면 태평성대가 온단다. 그러나 빈 들을 지키고 선 지금은 꽃 그득 피우고도 열매 달지 못할까 걱정이다. 동박새 소리는 들리지 않고 직박구리만 번잡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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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 곤충농장. / 박보근 노동자

차를 돌려 나오는데 'ㅇㅇ곤충농장'이란 팻말이 보인다. 곤충농장? 이것도 함평 나비 축제처럼 관광객을 위해 만든 농장인가 궁금하다. 궁금하면 오백 원 대신 음료수 한 통 사들고 불문곡직 대문을… 두드리려는데 대문이 없다. 완전 개방된 농장이다. 멋진 벼슬과 꼬리 깃이 우아한 장닭이 갓 올라온 들꽃 이파리를 뜯으며 구구구 암탉을 부르고 사육사 앞개울 웅덩이에는 도롱뇽 알이 똬리를 틀었다. 마침 사육사에서 나오던 주인과 인사를 나누고 부인은 꽃차를 내왔다. 농장 주인에게 물었다. 곤충을 사육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곤충은 미래 식량입니다."

처음 그가 곤충을 접하게 된 계기는 그의 아들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곤충을 좋아하여 온 방 안에 곤충을 기르는 통에 부부가 쓰던 안방까지 빼앗기고 문간방에서 지내기도 했단다. 어느 날 아들이 곤충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도 되느냐기에 그래라 했더니 초등학생을 찾아온 친구들이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알만한 대학 생물학 교수들이었단다. 그들에게 아들의 재능과 곤충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접하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아들을 지원하기 위해 운영하던 철물점과 간판업을 정리하고 2002년 곤충 농장을 지었다. 그러나 혐오 식품이란 편견에 부딪혀 초창기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중 가장 큰 난관은 그를 곤충 세계로 이끈 아들과의 충돌이었다. 환경과 곤충을 연구하고 보살피는 아들은 식품 원료로 곤충을 사육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또한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십수 년 간 충돌하던 부자는 아버지가 단순 사육 번식 농장에서 곤충 생태 체험 농장을 겸하여 운영하면서 갈등이 해소되었다. 거기다 작년 12월에 흰점박이꽃무지 유충(꽃벵이)과 장수풍뎅이 유충(장수애)이 식품 원료로 추가 등재되어 곤충 식품 시장도 전망이 밝다고 한다. 체험 농장을 겸하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양, 토끼, 당나귀, 오소리 등을 키워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산방산 기슭에 자연 상태 곤충 숲을 구상하는 그가 체험료를 내라고 했다. 엉겁결에 호주머니로 손이 가는 나를 제지하며 부인에게 눈짓한다. 잠시 후 따끈하게 데워진 약사발이 앞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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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험 시설을 갖춘 곤충 농장. / 박보근 노동자

"이놈 한 사발 드시는 게 우리 농장 체험료입니다. 굼벵이 중탕이올시다."

딸꾹~ 걸쩍지근하지만 못 마시겠달 수도 없고 눈 질끈 감고 들이켰다. 응? 비리지 않고 오히려 고소한 맛이 난다. 사람들은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 숲을 베어 목장을 만든다. 그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자란 소가 우리 식탁에 몇 번 오르고 나면 초원은 황폐해지고 다시 숲으로 복원되려면 수십 년이 걸리거나 아예 사막화로 진행되어 숲이 영영 사라지기도 한다. 기업식으로 밀집 사육된 가축은 우리에게 항생제에 찌든 단백질을 제공한다. 저 들에 철 따라 뿌리고 거둔 곡식에 쪼시개나 대 낚싯대 하나 들고 물 따라 나가 따거나 건진 갯것 얹어 차린 건강한 밥상이 사라졌으니 곤충이 미래 식량이라는 그의 말에 공감이 간다.

산들산들 부는 봄바람을 맞으며 산달섬으로 간다. 법동리의 고당, 법동, 아지랑 마을은 산달섬을 얼싸안은 듯 마주보고 있는데 거제 사람들조차 잘 모르는 마을이다. 잘 알려진 마을이 아니다 보니 자연 환경은 최고다. 물도 바닥이 훤히 보이게 깨끗하고 마을도 고즈넉하다. 법동 선착장에서 차를 타고 배에 오른다.

작은 페리선은 후진으로 배에 올라야 한다. 갑판이 좁아 차를 돌릴 수 없기 때문에 전진으로 들어가면 내릴 때 아주 낭패를 본다. 산달섬으로 건너가는 뱃길 주위로 하얀 부표들이 줄을 지었다. 굴양식은 이제 끝물이라 부표를 거의 다 정리했을 텐데 무엇인지 물었더니 벚굴 부표란다. 여름에도 먹을 수 있는 벚굴은 수심 10m 이상의 바위에 붙어 자라기 때문에 바위굴이라고도 부른다. 크기도 엄청나다. 다 자라면 어린아이 얼굴만 하다. 한입에 다 먹을 수 없어 여러 조각내어 먹어야 하는 벚굴은 여름철에도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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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달섬 산후 마을 매화. / 박보근 노동자

산달섬은 당골재산과 뒷들산, 건너재산 세 산봉우리 사이로 달이 솟아올라 삼달이라 부르다 산달이 됐다고도 하고 산에서 달이 뜬다 하여 산달이라 불렀단다. 산달섬은 굴과 유자가 유명하다. 끝물 굴까는 작업이 한창인 굴막 근처에 줄로 가리비나 굴 껍질을 꿰어 수북이 쌓아 놓았다. 곧 여기에 종패를 부착시켜 바다에 늘어뜨리면 내년 굴 농사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유자는 옛날보다 소득이 높지 않아 많은 농가들이 생산을 포기했지만 산달섬에는 아직 많이 재배하고 있다. 산달섬을 돌다 보면 없는 게 있다. 식당과 가게가 하나도 없다. 빼어난 경관도 없다. 그러나 잔잔하고 맑다. 폐교된 산달분교 운동장에서 법동 마을 쪽을 보니 섬과 섬을 잇는 다리 공사를 하고 있다. 저 다리가 완공되면 식당도 생기고 가게도 생기겠지. 그리고 좀 북적거리고 물결이 일고 흐려질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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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리비나 굴껍질을 엮어 내년 굴 농사를 준비한다. / 박보근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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