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 문화 탐방] (3) 창원 주남저수지
'밭농사 활발했던 자연제방·생명 젖줄 배후습지' 곳곳 매력 가득
쇠도끼·청동무기 등 2000년 된 유물 출토 '살아 숨쉬는 역사'비춰
인공제방 건설·소작농 고달픔 남기도…다양한 사연 한데 어울려

◇저마다 색다른 세 저수지

주남저수지는 셋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 산남저수지, 가운데 주남저수지, 남동쪽 동판저수지가 그것이다. 이들 서쪽에는 모두 산자락이 내려와 있다. 산남은 백월산 기슭에 놓였고 동판은 구룡산 기슭에 놓였으며 주남은 백월산과 구룡산 기슭 모두에 걸쳐져 있다. 주남저수지는 두 갈래 물줄기로 낙동강과 이어진다. 하나는 정북쪽 본포마을로 난 인공수로이고 다른 하나는 동북쪽 유등마을로 향하는 주천강이다.

세 곳 저수지는 저마다 특징이 뚜렷하다. 산남은 크기가 작다. 찾는 사람도 적어서 새들에게 좋은 쉼터가 된다. 물이 얕은 편이라 작은 철새가 많이 찾는다. 개구리밥·마름 같은 작은 물풀이 수면 가득할 때가 많고 풍경은 한가롭다. 주남은 씩씩하고 시원하면서 다채롭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 탐조대가 마련돼 있는 동쪽 제방에서 보면 경관이 단조롭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그와는 다른 느낌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동판은 숨은 듯 앉아 있다. 왕버들 등이 곳곳에 있어 느낌이 아기자기하고 다정다감하다. 사람이 별로 찾지 않고 물이 깊어 고니처럼 큰 철새가 쉬었다 간다.

주남저수지 남동쪽 동판저수지 모습.

이런 주남저수지의 본바탕은 낙동강 배후습지다. 강물은 홍수가 나면 양옆으로 넘치면서 자연제방을 쌓는다. 강물에 섞여 있던 자갈과 모래와 흙이 강가를 따라 쌓이면서 도도록해진다. 이런 자연제방 때문에 넘쳐흘렀던 물이 갇히면 습지가 형성된다. 강줄기 배후(背後)에 만들어졌다고 하여 배후습지라 한다. 지금은 일대 자연제방과 배후습지가 구분없이 모두 농토로 바뀌어 대산평야를 이루고 있다.

먼 옛날 사람들이 먼저 살기 시작한 데는 배후습지가 아니라 자연제방이다. 주남저수지 일대를 두고 말하자면 낙동강 쪽은 높이가 해발 10m 안팎이지만 주남저수지 쪽은 3m 정도밖에 안 된다. 주변보다 볼록 솟은 자연제방에서는 농사도 어렵지 않게 지을 수 있었고 안전한 거처도 손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100년 전만 해도 주남저수지 일대 낙동강 따라 길게 자리 잡은 자연제방에서만 농사가 안정적이었다. 강이 가까우니 논농사였으리라 짐작하기 쉽지만 실은 밭농사가 대부분이었다. 자연제방 농토는 모래가 많은 사질토여서 물을 머금지 않았던 탓이다.

논농사에 적합하게 물을 머금는 진흙 펄은 아래쪽 배후습지로 쓸려 내려갔다. 사람들은 배후습지에서 부분적으로 벼농사를 지었지만 비가 조금만 내리면 물에 잠겼다. 물은 낙동강에서도 역류해 들어왔고 서쪽의 백월산·구룡산 여러 골짜기에서도 쏟아져 내렸다. 실농을 하면 다른 곡물 씨앗을 대신 뿌리는 대파(代播)를 하였다. 지금은 잡초 취급을 받지만 옛날에는 줄이나 피가 대신 심는 구황식물이었다고 한다.

◇붓·칠기 출토된 다호리고분군

주남저수지 일대는 오랜 옛날부터 사람살이의 터전이었다. 다호리고분군은 옛날 삶터의 뚜렷한 물증이다. 언덕배기에 앉은 다호마을이 동쪽 배후습지(동판저수지)를 향해 흘러내리는 비탈에 있다. 2100~2000년 전 가야 무덤들로 1988~91년 발굴에서 유물이 많이 나왔다. 습지가 아니면 삭거나 썩어졌을 것들이 축축한 물기 속에 있으면서 산소가 차단된 덕분에 온전하게 남을 수 있었다.

화폐 구실을 겸했던 쇠도끼(철부·鐵斧), 해외교역을 일러주는 중국 동전 오수전(五銖錢), 350살 먹은 참나무로 만든 널(관·棺)이 출토되었다.

아울러 눈활과 화살, 청동제·철제 칼을 비롯한 무기들, 쇠낫·괭이 같은 농기구, 중국에서 들여온 청동거울 등도 나왔다. 특히 함께 출토된 여러 칠제품(漆製品)과 붓·긁개(요즘 지우개)는 크게 눈길을 끌었다.

옛 삶을 비추는 덕천리지석묘.

먼저 붓과 긁개는 문자 사용을 보여주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증거다. 다음으로, 칠그릇은 고유한 옻칠 문화일 가능성을 높였다. 그때는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킨 중국 한나라의 낙랑문화가 옻칠의 뿌리로 여겨졌었다. 그런데 다호리에서 같은 시대에 만든 칠그릇이 나와 낙랑문화와 상관없이 동시에 공존했을 가능성을 보였다. 1997년에는 다호리 가까운 덕천리지석묘에서 대략 2300년 전 칠그릇이 나옴으로써 우리 옻칠 문화의 고유성이 완전히 입증되었다. 다호리에서 나온 목재품은 거의 옻칠이 되어 있었다. 옻칠을 하면 보기도 좋고 썩지도 않고 벌레도 먹지 않고 오래간다.

이보다 앞선 시기 자취로 '합산패총'이 있다. 합산마을에 있어 합산패총이라 하는데 산남저수지 동쪽 부분과 맞물린다. 합(蛤)은 조개이니 조개가 산더미로 쌓였다 또는 산이 조개처럼 생겼다 정도가 되겠다. 신석기시대(8000년 전)~철기시대(2000년 전) 일대 언덕배기에 살던 사람들의 쓰레기터다. 재첩 껍데기가 나온다니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 섞이는 기수역(汽水域)이라 여기면 맞겠다.

합산패총과 다호리고분군은 일대가 습지였기 때문에 만들어졌고 뜻깊은 문화재까지 출토된 현장인데도 막상 가보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거리가 없다. 안내판도 다호리고분군만 있고 합산패총은 없다. 덕천리지석묘는 육군종합정비창 안에 있어서 찾아가기조차 어렵다.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인간 역사·문화와 습지의 관계를 아우르는 전시 공간이 하나 주남저수지 둘레에 들어서면 좋겠다.

◇축조와 대산평야

주남저수지 일대는 일제강점기를 맞아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다. 당사자는 일본사람 무라이 기치베에(村井吉兵衛)였다. 담배를 팔아 큰돈을 벌어들인 연초왕으로 1912년 주남저수지 일대 대산평야에 들어왔다. 900만 평에 이르는 촌정농장=무라이농장인데 늪지대와 황무지가 대부분이던 일대 토지에 17만 원을 들여 제방을 두 겹으로 쌓고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수로를 내었다.

제방은 자연제방과 배후습지 사이에 먼저 들어섰다. 1913년이지 싶은데 산남마을에서 대산면 소재지까지 들판 여기저기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야트막한 구릉(독뫼=똥뫼)들 사이를 높이 2~3m 둑을 쌓아 이었다. 이 촌정제방=무라이제방은 낙동강이 아니라 배후습지에서 물이 못 들어오도록 막는 구실을 했다.

주남저수지제방은 뒤이어 1922~24년 쌓았는데 1920년 설립된 대산수리조합이 주축이었다. 1928년까지는 주남저수지에서 직선거리로 7㎞ 떨어진 북쪽 낙동강변 본포까지 인공수로를 내었다. 함께 설치된 본포양수장은 가물 때 물을 주남저수지로 퍼넘기기도 했고 자연제방 농지에도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했다. 이로써 자연제방의 밭들이 논으로 바뀔 수 있었다.

1936년에는 낙동강제방을 새로 쌓는(처음 축조는 1928년) 한편 23년 전 쌓은 촌정제방과 주천강이 만나는 지점에 갑문을 설치해 낙동강의 역류를 막았다. 그러는 사이 농장 소유권은 1927년 부산 거부 하자마 후사타로(迫閒房太郞)에게 170만 원에, 1938년에 다시 천일표 고무신으로 유명했던 의령 출신 김영준에게 270만 원에 넘겨졌다.

소출은 엄청났다. 기치베에의 경우 1922년 소작료로 걷은 곡식이 벼 2만 7000섬, 보리 1700섬, 콩 1000섬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인들은 제방 쌓는 데 헐값으로 동원되고 비싸게 소작을 부쳐 목구멍에 풀칠을 해야 했다. 일본인 지주의 곳간은 조선인 소작농의 고달픔과 괴로움으로 가득 찼다. 그러다 해방된 뒤에는 1969년 9월 대홍수를 맞아 창원농지개량조합이 1970~76년 제방 높이는 작업을 벌였다.

◇풍성한 이야기 안기는 삶터

이렇게 보면 주남저수지는 그 자체로 우리나라 근대농업유산이다. 그냥 있는 습지가 아니고 아무렇게나 생긴 농토가 아니다. 자연제방과 배후습지를 나누었던 무라이제방은 지금 도로로 쓰이고 있다. 본포를 향해 나 있는 인공수로에도 자세히 살펴보면 일제강점기 자취가 남아 있을 것이다.

1922년 만든 주남배수문.

주천강 또한 근대농업유산을 여럿 안고 있다. 시작 지점에는 1922년 만든 콘크리트 배수문이 있고 하류 쪽 800m가량 '주남교'도 원래 수문이었지 싶다. 위에 아스팔트가 씌워져 있고 철제 난간도 있어 영판 다리지만 상판·다릿발을 보면 원래 쓰임새가 무엇인지 짐작이 된다. 돌을 정육면체로 다듬어 가지런히 쌓고 콘크리트로 이어 붙였다. 다릿발 사이가 무지개 모양인데 가운데 둘은 낮고 양옆 둘은 높다. 바닥도 정육면체 다듬은 돌과 콘크리트로 마감했는데 가로로 길게 파인 홈이 있어서 수문을 막는 철판이 끼이도록 했다. 전체적으로 조화롭고 아름답다. 주천강이 흘러 김해 한림면과 창원 대산면을 잇는 우암교에 이르면 1936년 설치된 주천갑문이 보인다. 또 창원 대산 제동·우암리와 김해 진영 진영리가 톱니처럼 맞물리는 지점에는 직강화되기 전에 곡류사행하던 자취가 남아 있다.

무라이 기치베에에게는 무라이 요시노리(1943~2013)라는 손자가 있다. 손자는 2010년 5월 할아버지가 경영하던 김해 진영 촌정농장 자리를 찾아가 주민들에게 "100년 만에 왔다. 여러분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고 일본말로 한 다음 "미안해요"라고 한국말로 얘기했다. 요시노리는 와세다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일제강점기와 그에 뒤이어 벌어진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침략·수탈을 연구·고발하는 작업을 죽을 때까지 벌였다. 이런 스토리까지 겹쳐놓으면 주남저수지와 일대 대산평야가 더욱더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주천강 주남교에서 상류 쪽 200m가량 지점에 놓여 동읍 판신마을과 대산면 고등포마을을 잇는 주남돌다리, 신방초교 뒷동산의 천연기념물로 700살이 넘었다는 음나무 네 그루, 칠성그린아파트 담장과 바짝 붙어 있는 작은 바위 동산의 300년 가까이 된 포구나무 열한 그루를 더해도 좋을 것 같다. 옛날 모습과 사연을 품고서 주남저수지를 찾는 이들에게 좀 더 풍성한 느낌을 안기는 존재들이므로….

창원시 동읍 판신마을과 대산면 고등포마을을 잇는 주남돌다리.

/공동취재단

주관 :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

문의 : 환경교육팀 055-533-9540, gref2008@hanmail.net

수행 :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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