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충렬사 인근, 공덕귀 여사 생가 표지석을 쓰다듬는다.

여사는 일제의 군대해산으로 폐인이 된 아버지와 신사참배를 거부한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통영공립고등학교(통영여고)를 졸업했다. 일제 강점기와 군부독재 때 수차례 고춧가루 물고문 등 고초를 겪었다. 결혼으로 신학자 꿈을 접었다. 4·19혁명 후 남편 윤보선이 대통령이 되지만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박정희 쿠데타로 남편이 하야할 때 "꿈에 그리던 민주주의를 꽃피우려 할 즈음…"이라며 통탄했다. "가관"이란 말은 박정희가 3선 개헌을 할 때 던진 말이다.

쿠데타 후 여사는 '빈자의 울타리', '억울한 이의 방패' 등으로 불렸다. 민청학련 사건과 여성, 가난한 이의 삶에 "영부인이었으므로…"라며 인권운동에 투신했다. 수년간 매일 인권 강연회를 열고 양심수를 찾아 교도소로 갔다. 구류를 살고, 방림방적 노동자 체불임금대책위 위원장까지 맡는다.

"어머님은 '영부인' 타이틀을 과시용이 아닌 억울한 여공들을 위해 활용하셨어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방패처럼 앞장서셨습니다."

며느리 양윤선 여사의 말이다.

교회 내 성 평등, 기생관광, 미스코리아 문제 같은 여성문제, 사회·환경문제, 원폭피해자 문제 등 약자가 있는 곳에 여사는 있었다. 내각제하 영부인이라고 하지만 타 영부인들과는 깊이와 차원이 달랐다.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역사에 여사를 빼고 설명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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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와 차원이 또 다른 한 대통령이 잡혀가고, 며칠 전 29만 원밖에 없다던 전두환, 그 마누라 이순자 회고록 소식은 '징글징글'했다.

그날인가, 지나던 길에 명정동 공덕귀 여사 생가 표지석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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