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산] (8) 사천
옛 사천 고을 두음벌산 '진산' 지리산 명맥 이어지는 곤양
조선 세종대왕 태 안치돼
봉명산엔 천년고찰 다솔사도

사천시 사천읍에 있는 수양공원은 꽤 운치가 있어 걸을 맛이 난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사천읍성의 일부가 남아 있다. 성벽 길을 돌아 전망대에 오르면 사천읍내와 그 너머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사천은 지금의 사천읍, 사남면, 정동면을 포함하는 고을이었다. 고을의 진산(鎭山·나라가 지정한 고을을 수호하는 산)은 동쪽에 있는 두음벌산(豆音代山·210m)이다.

◇사천 고을의 진산, 두음벌산

조선시대 지도와 지리서는 두음벌산과 함께 두음산(豆音山) 혹은 두벌산(豆伐山)이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부봉산(浮蜂山)이란 이름도 나온다. 벌이 나는 모양이어서라는 견해도 있고, 두음벌을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사천읍 주변 노인들은 '뚬벌산'이나 '뚬벙산' 같은 옛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비슷한 자리에 정령산이라고 표시된 것이 있는데, '뚬벙산은 풍정마을 뒷산'이라는 주민들의 이야기대로라면 이 산이 바로 두음벌산인 듯하다. '두음벌'은 옛 사천 고을을 이르던 이름이다. 비사벌(창녕), 미리벌(밀양)과 같은 옛 가야국의 이름이다.

조선시대 지도 중에는 두음벌산 자락에 옥산(玉山)을 표시해 놓은 게 더러 있다. 풍정마을 앞에 있는 작은 언덕인데, 옛날에는 활을 만들던 시누대(箭竹)가 많은 산으로 기록은 전한다. 이 산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1970년대 옥산에서 흙을 퍼다가 사천 비행장 공사 매립토로 썼다. 이후 도로를 만들면서 옥산은 그 형태를 완전히 잃었다. 지금은 산이 있던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사천 지명 발생지

사천시 정동면 고읍리는 너른 들판을 거느린 마을이다. 서쪽으로는 사천읍, 남쪽으로는 사천강을 경계로 한다. 이름 그대로 '고읍(古邑)', 옛 고을이다. 세종 27년(1445년) 이전까지 사천 고을의 읍치가 이곳에 있었던 까닭이다. 이후 읍치는 지금의 사천읍 정의리, 선인리 일대로 옮겨진다. 현재 사천읍성이 있는 자리다.

사천읍성./유은상 기자

고읍리에서 사천강을 건너면 바로 성황당산(城隍堂山·209m)이다. 성황당 또는 서낭당은 마을과 토지를 수호하는 서낭신을 모시는 장소를 말한다. 산 위에 산성이 아직 남아 있는데, 성황당산성 혹은 고읍성으로 불린다. 현재 경남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산 이름이나 산성이 있는 것을 볼 때 고읍 마을이 사천의 읍치였을 시절에는 성황당산이 고을 진산 노릇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황당산 능선은 바로 이구산(尼丘山·379m), 능화봉(陵華峯·285), 흥무산(興霧山·455m)으로 이어진다. 지맥이 와룡산에서 뻗어나오는 것을 고려하면 흥무산에서 시작해 성황당산에서 끝나는 산세다. 이구산은 옛 지도에 니산(尼山)으로 나온다. 공자가 태어난 중국 산동선 곡부시에 있는 니구산과 같은 이름이다. 마찬가지로 사천강은 옛 지도에 사수(泗水)나 사천수(泗川水)로 나오는데 역시 곡부에 있는 강이름과 같다. 이는 옛 유학자들이 공자를 높이 받들고 유학(儒學)을 일으켜 세우려고 붙인 이름이다. 여기서 사천이란 지명이 나왔다.

◇삼천포의 산들

삼천포 바닷가에 우뚝 솟은 각산(角山·408m)은 문자 그대로 산이 용의 뿔을 닮았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대부분 조선 지도가 그렇게 높지 않은 이 각산을 표시한 사실과 각산산성이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을 보면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산 정상에 있는 각산봉화대는 경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돼 있다. 남쪽 봉우리에는 마찬가지로 경남도 문화재자료인 각산산성도 있다. 산 정상에서 남해군 쪽으로 보는 바다 전망이 일품이다. 현재 삼천포대교가 이어진 초양도에서 바다를 건너 각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바다케이블카 공사가 한창이다.

초양도에서 바라본 각산./유은상 기자

각산에서 삼천포항 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망산(望山·61m)으로 불리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다. 지금은 망산공원 혹은 선구공원으로 불린다. 이름 그대로 옛날에 망루(望樓)가 있어 왜구가 쳐들어오는 것을 감시했다고 한다. 낮아도 정상에 서면 삼천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올 만큼 전망이 좋다.

◇옛 곤양 고을의 진산, 동곡산

조선시대 곤양은 사천시 곤양면, 곤명면, 서포면 일대, 하동군 진교면, 금남면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었다. 곤양은 한때 남해군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세종이 즉위한 다음해 1419년 곤양 마을에 태실(왕실의 태를 봉안하는 곳)을 짓고 남해군을 합쳐 곤남군으로 승격했다. 이때 읍치가 지금 곤명면 금성리다. 이후 1437년에 남해군을 분리하고 곤양군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읍치는 지금 곤양면 성내리 주변이다. 곤양 고을의 진산(鎭山)은 읍치 북쪽 동곡산(銅谷山)이다. 지금은 이 지명을 쓰지 않는다. 조선시대 지도에 그려진 산맥과 현장 답사를 통해 볼 때 곤양면사무소 뒤편에 있는 성내공원이 있는 산이 동곡산인 듯하다.

단종 태실지./유은상 기자

조선시대 곤양은 작은 고을이었지만 행정구역이 현(縣)보다 한 단계 높은 군(郡)이었다. 이는 세종대왕의 태가 안치된 덕분이었다. 예로부터 곤양땅은 지리산 정기가 이어지는 천하명당으로 유명했다.

◇천하명당을 이룬 산세

생거하동 사거곤양(生居河東, 死居昆陽) 설도 전한다. '살아서는 하동 땅에 살고, 죽어서는 곤양 땅에 묻혀야 한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만큼 묘를 쓸 자리로 좋다는 말이다. 이 중심에 소곡산(所谷山)이 있다. 조선 시대 지도에 소곡산은 하동군 옥종면 양구리 옥산(玉山 ·614m)에서 시작해 사천시 곤명면 송림리 송비산(松飛山·243m)으로 이어지는 줄기 중간에 있다. 요즘 지도에는 지명이 없는데, 현재 세종대왕태실지가 있는 산인 듯하다.

제왕이 나올 산세는 또 있다. 하동군 진교면 월운리 이명산(理明山·572m)에서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봉명산(鳳鳴山·400m)으로 이어지는 산세다. 이명산 산하 십리 안에 만군을 호령할 천자가 나오고 미래 세계를 이끌어갈 현량들이 모여 마음껏 토론할 수 있는 도량이 생길 것이라는 설이 전해진다. 지기(地氣)를 죽이려고 일제가 봉명산과 이명산 근처에 쇳물을 끓여서 부었다는 말도 전한다. 봉명산은 지리산과 같은 방장상(方丈山)으로 불릴 만큼 지리산 명맥이 이어진다고 알려진 곳이다. 이 지리산의 기운을 받는 자리에 천년고찰 다솔사가 들어서 있다.

사천 봉명산이 포근하게 품은 천년고찰 다솔사./유은상 기자

[참고문헌]

<사천시사>(사천시사편찬위원회, 2003)

<사천읍지>(사천읍지편찬위원회, 2010)

<곤양향토사>(곤양향토사편찬위원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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