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희로애락 이 안에' 진심 담은 말의 힘
어려웠던 유년시절 딛고 군대서 '사회자 자질'발견
입담 살린 평생 직업 선택

새까만 어둠이 덮친 주차장. 차량 안에 몸을 구겨 넣은 소년이 가족 틈 사이로 불편한 잠을 청한다. 아침에 일어나 공중화장실에서 대충 씻고 학교로 향한다. 발 뻗으면 벽이 닿는 쪽방이지만 누울 공간이 있던 그때가 그립다. 소년은 중학생이 되자마자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한다. 자연스레 학업은 소홀해졌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오토바이도 곧잘 탔다. 어김없이 밖을 헤매던 그날 집에서 급히 연락이 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바보같이 아프신지도 몰랐다. 마지막 가는 길마저 지키지 못한 죄책감이 뒤늦게 밀려왔다. 허망하게 아버지를 보내고 나서야 사뭇 삶에 대해 진지해졌다. 생각 끝에 마음을 굳힌다.

"중학교 때 댄스 동아리 활동하면서 지역대회에서 1등을 한 적 있어요. 앞으로 뭐 하면서 살아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는데 그때 환호와 함성이 떠올랐어요. 무대에 서야겠다고 결심했죠. 유명해지면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테니."

사진은 tvN 〈SNL〉 등 각종 TV 프로그램과 돌잔치 등에서 MC를 보는 방경태 씨.

15년 전 기억을 상기하는 방경태(33) 씨. 사람들 관심을 받으려 무대에 오르려고 했던 그가 지금은 마이크를 잡고 있다. 경남·부산지역에서 전문MC로 활동하고 있는 것. 단역 배우로 드라마에 잠깐 얼굴을 내비치기도, 개그맨 지망생으로 소극장 지하생활을 마다 않던 그가 MC로서 자질을 발견한 건 다름 아닌 군대에서다.

아프가니스탄으로 파병 나간 경태 씨는 당시 각국 장병끼리 치르는 부대 내 월드컵 경기에서 우연잖게 중계를 맡았다. 평소 친구들을 웃기며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던 그는 유감없이 끼를 발산했다. 시종 웃음이 끊이지 않던 중계가 끝나자 계급, 지위를 막론하고 칭찬이 쏟아졌다. 사회 재미있게 잘 본다고. 그 뒤 부대 내 각종 행사 진행은 경태 씨 차지였다. 막연히 사람들 앞에 서고 싶었던 그를 무대 위로 이끈 건 연기도 춤도 아닌 '말'이었던 것. 제대 뒤 경태 씨는 돌잔치 MC로 본격 나선다.

사실 입담 하나만 믿고 행사를 진행하기는 쉽지 않다. 타이밍에 맞게 유머를 구사해야 하는 센스는 물론, 돌발 상황에 대처할 줄 아는 순발력도 필요하다. 경태 씨는 이에 세심함을 더했다.

줌마렐라 카페에 행여 아이가 아프다는 글이 올라오면 놓치지 않고 아이 안부를 챙기는가 하면 돌잔치마다 일관된 유니폼이 아닌 개성을 살린 스타일로 분위기를 돋웠다. 호응이 유난히 좋은 참석자에게는 행사 때 경태 씨를 지정해서 부를 수 있는 쿠폰을 나눠주기도 했다. 짜인 멘트를 하고 춤만 추는 게 아니라 아이 첫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다 같이 즐길 수 있도록 애썼다.

그 덕분인지 경태 씨는 엄마들 사이에서 일명 '프린스(왕자)'라 불리며 업계에서 정평이 난다. 팬카페가 생길 정도로 인기도 상당했다. 돌잔치 MC로 몸담은 지 6년째 되던 해, 경태 씨는 직접 1인 회사를 설립한다. 소속된 회사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무대를 만들고 싶었다. 연습실 하나 변변치 않았지만 그간 닦아 놓은 기반을 토대로 금세 자리를 잡았다. 한때 직원이 40명까지 늘기도 했다. 하지만 경태 씨 마음 한 구석이 어쩐지 허전했다. 전문MC에 대한 갈증 탓이었다.

"줄곧 돌잔치만 하다 보니 틀에 갇힌 느낌이 들었어요. 기업, 학교, 결혼식, 대학, 체육대회, 축제 등 다양한 행사에서 활동할 수 있는 전문MC로 거듭나고 싶었죠."

더 큰 세상을 경험하고자 경태 씨는 서른이 다 되어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가르치는 곳도 배울 곳도 없는 업계. 텃세는 심했고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그는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표준어 억양을 익히기 위해 수없이 연습하고 각종 영상도 섭렵했다. 마침내 그에게 기회가 왔다. 방송에 앞서 객석 분위기를 풀어주고 공지사항을 전달하는 사전MC를 보는 거다. KBS2 〈1대 100〉, 〈불후의 명곡〉, tvN 〈SNL〉 등이 그가 거쳐 간 무대다.

경태 씨는 머물지 않고 안주하지 않는다. 마이크를 잡고 나이 들어감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자신을 본 또 다른 이가 MC의 꿈을 품을 수 있도록.

어렸을 때 어렵게 살았던 그인지라 돈의 가치를 일찍 깨달았다. 그보다 소중한 가족의 의미도 늘 되새긴다. 바쁜 서울생활 틈틈이 지역 돌잔치, 결혼식 등 가족이 함께하는 행사를 챙기는 이유다. 누군가를 웃기고 울릴 수 있는 말의 힘을 아는 경태 씨. 그는 마이크에 진심을 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진심은 통한다 하지 않는가. 경태 씨는 머지않아 엄마에게 더 크고 멋진 무대에 선 아들 모습을 보여줄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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