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족만의 사건이 아닌 모두의 사건
'나를 위해'진상 규명하고 책임 물어야

지난 23일 새벽 3시 45분, 드디어 세월호가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새벽 2시쯤에 잠을 깬 나는 세월호 탓인지 더 이상 잠을 청할 수 없었다. 해가 뜨고 밝은 빛 아래 드러난 선체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구멍 나고 녹슨 선체와 표면을 에워싼 해조류 흔적은 지난 3년간 속절없이 타들어간 유족들의 심신을 묘사하는 것 같았다.

세월호가 모습을 드러내자 잊고 있던 기억과 감정도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세월호가 침몰하던 순간 나는 모 도서관에서 한창 문서작업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날 문서는 망쳤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부 측 태도는 이상하게 바뀌었다. 난데없이 보상금 이야기가 나오더니 유가족에 대한 비난 여론이 조성됐다. 일베 같은 극우 사이트에서 유가족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글이 올라왔고, 무덤으로 들어간 줄만 알았던 서북청년단이 부활해 광화문 유가족 텐트를 배회하며 위협을 가하는 장면이 보도됐다.

그해 가을 어느 날 세월호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유가족과 지지자들이 단식하는 현장에 백여 명의 청년들이 나타나 버젓이 피자와 치킨을 시켜먹었던 이른바 '폭식 투쟁'은 모욕과 막장의 끝장을 보여주는 듯했다. 극우적 여론이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고 생각했을까? 어렵게 출범한 세월호특조위를 정부가 앞장서서 노골적으로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정부가 파견한 직원은 업무를 지원하기는커녕 태업하거나 방해하기 일쑤였고, 여당은 특조위에 '세금도둑'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씌우며 여론전을 펼쳤다. 특히 특조위가 청와대 조사를 예고한 작년 6월 정부는 특조위를 강제 종료시키는 초강수를 뒀다.

지난 탄핵 정국 때 김영환 비망록을 통해 김기춘이 주도하던 청와대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이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대통령과 정부는 자기 잘못을 은폐하려고 모든 아이디어와 역량을 집중했다. 심지어 희생자를 모욕하고 유가족에게 누명까지 씌워 공격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 몰염치와 안하무인, 그리고 비겁한 폭력들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세월호가 떠오르며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문득 깨달았다. 청와대가 앞장서서 세월호 인양을 방해했던 이유가 바로 이 감정에 있구나! 침몰 과정을 생방송으로 지켜보며 내 고통으로 아파했던 사람들, 유가족과 함께 광화문 현장을 지키며 쏟아지는 모욕과 누명과 폭력을 내 것으로 받아 안고 견뎌냈던 사람들에게 세월호는 더 이상 제3자의 사건일 수 없다. 세월호가 바로 '내가 당한 사건'이고 진상규명을 '내 사명'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수만 명, 수십만 명, 혹은 수백만 명으로 확대되는 장면을 그들은 목격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호는 이제 유가족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사건이 됐다. 세월호 진상 규명은 희생자와 유가족의 명예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절차가 됐다. 이 모든 과정을 밤새워 지켜본 사람들은 유가족에 대한 동정심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존엄을 확인하기 위해 시간과 싸웠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 세월호 진상은 밝혀져야 하고 그 책임 또한 준엄하게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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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8월 어느 날 미국 워싱턴의 링컨기념관 앞에는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연설을 듣기 위해서였다. 홍보 도구가 부족했던 그 시절에 수많은 이들이 어찌 알고 하루도 넘게 걸리는 길을 마다치 않고 그 자리를 찾았다. 흑인 민권 회복을 꿈꾸는 그 자리는 흑인만을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연설 현장을 찾은 20만 명 중 25%는 백인이었다. 그들은 흑인 민권을 흑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문제로 여겼다. 흑인의 명예 회복을 자기 명예 회복으로 여긴 것이다. 이들 덕분에 미국 사회는 변했고 흑인 대통령까지 배출됐다. 이제 우리 사회가 변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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