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운동을 사회 전면에', '사회변화·성장 이끈 대모
추모사업회 새 도약 준비

선생님을 처음 만난 건 2000년 첫 애를 낳고 백일 정도 흘렀을 무렵이었다. 육아 스트레스에 산후 우울증으로 하루해가 뜨는 게 무서운 날들이었다.

아시는 분 소개로 '경남여성회'라는 여성단체가 운영하는 마을 도서관의 일을 제안받았다.

아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당시 내게는 그냥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디든 오케이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침 여성회 회장을 맡고 계신다는 분이 내가 살고 있던 신촌동에 살고 있다고 해서 평일 저녁 아파트를 찾았다.

칠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임대아파트의 5층에서 처음으로 선생님을 뵀다.

부리부리한 눈에다 짙은 눈썹, 약간 기에 눌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까지. 범상치 않은 인상이었다.

고 이경숙 선생./경남도민일보 DB

결국, 일을 같이하게 되었고, 교통이 불편한 신촌동에서 가음동 남산복지회관까지 차도 얻어타게 되면서 몇 년을 같이했다. 첫인상처럼 일에서는 엄격하고 단호하지만, 어찌나 여리고 순진한 면이 많던지.

1980년대 암울한 정권하에서 마산가톨릭여성회관, 노동상담소에서 민주화 운동, 노동운동의 일꾼을 기르시고, 마산창원여성노동자회, 경남여성회 등 지역 여성운동의 대모로서 부문 운동으로만 평가절하되던 여성운동을 전면에 내세운 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여성이 사회변화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자아성장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으셨고, 그 결과물로 2002년 민주노동당 비례로 도의회로 진출해 정치활동, 의정활동을 열심히 하셨다.

그런 삶이었기에 부고 소식이 알려진 순간부터 땅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전국 곳곳에서, 어디에 숨어있는지도 몰랐던 소중한 인연들이 장례식장 한편에서 슬퍼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2016년 12월 이경숙선생추모사업회는 또 한 번의 변화를 맞이했다. 그동안 '마산창원여성노동자회' 주관으로 '이경숙 선생 추모사업회' 활동을 진행했는데, 2016년 12월 정기총회에서 자체 회원조직으로 활동할 것을 결정했다.

▲ 마창여성노동자회 초대 회장을 지낸 이경숙 전 도의원 묘. /경남도민일보 DB

상황이 어렵고 힘들지만 여전히 선생님을 기억하며 그 뜻을 실천하려는 회원들이 남아 있어 선생님 이름으로 깃발을 세우게 된 것이다.

우리는 '추모'의 이름에 갇히지 말고 각자의 일터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선생님의 이름을 알리고, 선생님의 활동을 이어나가자며 머리를 모았다.

우선, 매달 한 번 서로 얼굴을 보면서 그 속에 들어 있는 '이경숙'을 찾아내고 서로 동질감을 느끼는 공감대의 시간을 만들었다.

만남의 장소도 각자 회원들의 일터를 돌아가며 선정해 조금 더 많은 회원이 함께할 수 있도록 고민 중이다. 이것은 운영위원 몇 명이 머리 모아 뭔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디지만 함께 의견을 내고 마음을 모아 활동을 완성해나가고자 하는 마음이다.

추모사업회는 온라인에 작은 공간도 만들 예정이다.

아직 그 이름을 정하지는 못했지만 각자가 가진 여러 기억을 모아내서 선생님을 만들어나가는 '기억의 저장소' 같은 꼭지도 만들려고 한다.

이것은 단순히 선생님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행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선생님이 하고자 했던 활동, 만들고자 했던 세상에 대해 되새기는 작업이다.

나아가 제2의 이경숙, 제3의 이경숙을 우리 이웃에서 만들고자 하는 바람이기도 하다.

지역에서 선생님을 아는 분들도, 알지 못하는 분들도 함께 그 취지에 선뜻 동참할 수 있는 추모사업회의 밑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다. 그 길에 관심 있다면 똑똑 노크 한 번.

/김영희(이경숙선생추모사업회 회원)

/경남노동자민중행동 필통(gnfeelto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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