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존중 없으면 '나'의 전진도 없어
정의로운 말 넘칠수록 좌절도 커질 것

안희정 충남지사가 일으킨 소위 '선의' 논란이 아직도 계속되는 모양이다. 발언이 있은 지 한 달이 넘었건만 경쟁자 진영은 공격을 멈추지 않고 안 지사는 여기저기서 해명하기 바쁘다.

안 지사 말의 핵심은 "그 누구라도 상대 의지를 선한 의지로 받아들여야 대화도 되고 문제 해결도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든 일부 사례가 적절치 못했다 하더라도 이 말 자체가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공방은 '어떻게 박근혜·이명박까지 선의로 받아들이냐' 등으로 이어졌지만 안 지사가 강조한 건 선이냐 악이냐 '진위'가 아니라 적을 존중하고 나의 오만을 경계하는 정치적·윤리적 '태도'였다.

제아무리 완벽하게 시시비비를 가린들 '100% 절대악(절대선)'으로 판명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많지 않다. 한데 우리는 종종 작은 악적인 요소만 갖고도 그 모든 것을 사악한 것으로, 아예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것으로 사정없이 몰아붙인다. 소통과 각성은 불가능하다. 더 심각한 건 상대뿐만 아니라 나 역시 더 깊은 지혜와 대안을 얻을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논란이 된 이명박 정부의 4대 강 사업을 예로 들어보자. 환경 파괴, 예산 낭비 등 숱한 오류가 있었지만 MB정부는 강 인근 주민 생활개선이나 경기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냥 '4대 강 사업은 절대악'이라고, '우리만이 정의'라고 자위하고 끝내고 싶은 사람이 많겠으나 그럼 사업을 지지한 주민이나 지방자치단체·기업은 대체 뭐였을까?

야권과 개혁·진보세력의 지역개발 정책은 그간 뭐가 달랐는지도 묻지 않을 수 없다. 환경·생태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지역 주민, 기업인, 노동자, 사회적 약자 모두의 삶에 도움이 되는 '대안적 개발'이라는 게 있었던가? 나와 적의 한계를 극복하는 동시에 적의 선의까지 껴안는 무언가를 고뇌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어떤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언젠가 한 칼럼에서 "어떤 이를 비판할 때 해서는 안 되는 일 중 하나는 상대방을 '비판하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그런 비판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비판당하는 적은 황당한 불쾌감을, 비판하는 나는 얄팍한 우월감을 느끼게 될 뿐, 그 이후 둘은 '이전보다 더 자기 자신인' 존재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고동우.jpg

안 그래도 온 나라가 대선을 맞아 적폐냐 아니냐, 패권이냐 아니냐 증오와 적대가 가득한 상황이다. 선과 악을 명징하게 가르는 정의로운 말들이 넘쳐나면 날수록, 상대의 선의를 헤아리지 않고 나의 악의를 의심하지 않는 분위기가 지속되면 될수록 그 대립은 한층 심각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큰 걱정은 그 정의로움이 성과 없이 패퇴하거나 '위선'의 다른 이름으로 추락했을 때다. 좋은 세상이 올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들에게 이보다 참혹한 좌절이 있을까? 제발, 부디, 세상이 바뀔 거라고 쉽게 말씀들 하지 마시라.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