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없음에서 비롯되는 악행 가능성
민주사회에선 비판적 사고 표출해야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정말 혁명적인 일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는 '생각하지 말고 남들보다 먼저 적응해!'를 지속적으로 강요하고 있다. 아이들에게도 그저 "말 잘 들으라"며 강요하고, 직장에서는 "시키는 대로 일하라"고 강요한다. 이러한 사회적 집단최면은 현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을 재생산하고,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외면하며 살아야 하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우리는 이런 불합리적인 상황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힘도 개선해 나갈 그 어떤 동기도 없다.

문제는 사유의 방향이다. 끊임없이 요구받는 그 무엇에 길들여지는 사유는 '하나의 생각'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 하나의 생각만 하며 산다는 것처럼 무서운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더욱 심각한 것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엄청난 갈등 속에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를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저 주어진 대로, 시키는 대로 사는 것만으로도 힘겹고 버거운 현실이기에 어쩔 수 없다며 타협해버리고 만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를 '생각 없음'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엄청난 힘이 있다.

'생각 없음'은 '무지(無知)'와는 다르다. 무지하다는 말 속에는 그 무지함을 인식하고 더 나은 앎으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생각 없음'은 그 의지마저 포기한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하고도 무서운 상태이다. 생각하고 말하고 또 그 생각을 행동하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보통의 경우, 말하고 생각하거나, 행동하고 생각하기를 반복한다. 이런 순서의 뒤바뀜은 고쳐져야 할 중요한 것들임에도 고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각은 방향이고 행동의 근거인데, '생각 없음'은 방향성도 출발점도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를 한곳으로 몰아가는 현실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충분히 생각한 후에 말하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 과정을 소홀히 할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악을 행하거나 인정해 버릴 수 있다.

독일, 히틀러시대의 야만이 고스란히 담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기획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가정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가장이요 다정한 아이의 아버지로 살았다. 그는 재판정에서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다. "나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신 앞에서는 유죄이지만, 이 법 앞에선 무죄다." 아이히만의 죄는 무엇일까?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죄는 "의심하지 않았던 죄"라고 지적했다. 지극히 평범한 아이히만에게서 한나 아렌트가 발견한 것은 '악의 평범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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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사유해야 하고 우리의 사유는 비판적이어야 한다. 비판적 사고는 누군가를 정죄하거나 판단하기 위함이 아닌, 객관적 진실에 근거하여 행동할 수 있는 근거가 비판적 사고의 토대여야 한다. 소위, 민주주의라 함은 자신의 소신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생각도 들을 줄 아는 힘이 있을 때 보장되는 것이다. 요즘처럼 소통의 부재를 느낀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한민족 안에 소통의 단절로 많은 국민들이 고통 받고 있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아직 민주주의의 봄이 오지 않은 것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필코 그날은 오리라 믿으며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는 따스한 봄날을 함께 기다린다. 반드시 수행해야 할 사유의 의무를 성실히 행하는 한 사람! 그리고 생각을 좇아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사회! 우리는 이런 세상을 만들어갈 동지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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