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인과 톡톡]노철효 유림건설 대표이사
시설물 보수·개량 전문, 경주지진 이후 일감 늘어
소형 이동형 별장 판매도, 매출 100억 원대로 성장

노철효(51) 유림건설주식회사 대표이사는 사람 좋은 인상을 품고 있다. 하지만 일 관련 얘기 때는 매서운 눈매를 보이기도 한다. 지난날 시간이 응축된 모습이기도 하다. 노 대표는 지금까지 늘 미래에 대해 긍정을 잃지 않았다. 때로는 마주한 현실에서 바닥을 경험하기도 했고, 그것을 굳세게 딛고 일어섰다.

노 대표가 이끄는 유림건설주식회사(창원시 마산회원구 소재)는 시설물 유지관리업체다. 개량·보수·보강공사를 전문으로 한다. 최근 창원시 봉암교 상판 교체, 저도연륙교 새 단장 작업에 참여했다. 2000년 법인 설립 이후 현재 매출 규모는 100억 원가량이다.

"사람들이 건강관리를 꾸준히 하잖아요. 건물·교량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점검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단 한 번에 치명적인 결과를 맞을 수 있습니다. 저희는 안전진단보다는 보강 쪽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경남에만 관련 업체가 260개가량 됩니다. 저희는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도 꾸준히 일을 맡고 있습니다. 여러 특허 등 저희만의 기술을 두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한때는 이익 가운데 절반을 기술연구에 투자했습니다."

노철효 유림건설 대표이사가 사업 출발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이야기하고 있다. /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1980년대 각종 붕괴사고가 일어나면서 교량·건물 등 시설물 유지관리와 보수 중요성이 확산했다. 처음부터 튼튼하게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노후화될 수밖에 없기에 지속해서 관리·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노 대표는 현재 이 분야 중심에 서 있으며, 대한시설물유지관리협회 경상남도회 부회장도 맡고 있다.

지난해 9월 경주 지진 이후 건물·교량 등의 안전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내진 관련 일감도 많이 늘었다.

노 대표는 '소형 이동형 별장'을 만들어 판매하는 사업도 추진 중이다. 또한 관광 연계 사업에도 눈길을 두고 있다. 옛 경남도지사 관사(현 경남도민의 집)를 관광용 한옥으로 꾸미자는 제안을 경남도에 하기도 했다. 아예 직접 매입해 추진하겠다는 계획까지 세웠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노 대표는 함안 가야읍에서 태어났다. 1녀 3남 가운데 셋째였다. 고등학교 시절 큰 방황을 겪었다. 농업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컸다. 6개월간 아버지를 설득한 끝에 자퇴했다. 그리고 부산지역 인문계고교에 진학했다. 동갑내기들은 고3인데 자신은 고1이었다. 각오는 했지만 현실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학교 밖에서 오토바이를 타며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럼에도 미래에 대한 막연한 자신감은 있었다.

"친구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지금은 너희들보다 공부를 못 하지만, 나중에는 부자가 될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 잘살 자신이 있다'고 말이죠. 뭔가를 열심히만 하면 잘될 수 있다는 신념이었습니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독일 외제 차를 타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독일 본사에 편지를 써서 카탈로그를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실제 집으로 날아왔습니다. 그걸 늘 가방에 넣어 다녔습니다."

부침을 거듭했지만 그래도 졸업은 했다. 이후 군대에 갔고, 그 전후로 자신의 미래 그림을 구체적으로 그렸다. 1989년 24살 나이에 사업에 뛰어들었다.

건설현장 일당 1만 8000원을 아껴 조금씩 모은 돈, 형한테 빌린 200만 원을 사업 자금으로 마련했다. 사업분야는 당시 용어조차 생소한 '리모델링'이었다.

"없는 돈을 쪼개 신문 1면에 '건물·주택 등을 리모델링한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반응이 괜찮았습니다. 큰 어려움 없이 일감이 들어왔습니다. 그래도 자본이 열악하다 보니 제가 일당백으로 일했습니다. 주변에서 '저렇게 일하다 쓰러지겠다'고 걱정할 정도였죠. 한번은 아버지가 제 일하는 현장에 오셨습니다. 저를 보더니만 데리고 나가서는 옷 한 벌 사 주시더라고요. 제 행색이 워낙 초라하게 보였던 거죠."

하지만 서른 살 즈음 큰 시련을 맞는다. 거래처 자금 사정으로 공사비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잇따랐다. 그게 쌓이면서 결국 주저앉게 된 것이다.

"자금회전이 되지 않는 '흑자도산'이었습니다. 밥 먹을 돈조차 없었습니다. 방황 정도가 아니라, 삶의 끈마저 놓으려 했습니다. 실제로 나쁜 마음을 먹고 지리산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 순간 어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지금까지 늘 저를 포근히 안아주셨던 어머니 마음을 무너지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1년 넘게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예전처럼 리모델링 사업을 이어나갔다. 물론 변화는 있었다. 수주 대상을 민간 아닌 관공서로 한정했다. 그러면서 사업이 차츰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때에도 일이 끊기지 않을 정도였다. 노 대표는 이후 2000년 시설관리분야로 전환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안정적인 생활이 이어지면서 다른 곳에 눈 돌릴 때도 있었다. 정치였다.

"상공회의소 위원을 맡고 있어서 그런지, 정치권에서 러브콜이 왔습니다. 심각하게 고민하며 주변 의견을 구했습니다. 우선 아내 반대가 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좋은 벗을 잃고 싶지 않다'며 극구 말리더군요.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죠. 결국 스스로 '사업가는 사업만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마음 접었습니다. 저는 지난 일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 쪽입니다."

이제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사회 소외된 곳에 시선을 두고 있다. 그는 사단법인 경남동그라미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 단체는 열악한 환경 때문에 질병을 계속 안고 사는 청소년·청년들을 돕고 있다.

2000년부터 지금까지 141명의 수술·치료를 지원했고, 현재도 15명을 돕고 있다.

"한 지인이 '어려운 누군가를 위해 뭔가 해보는 건 어떠냐'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경남동그라미회 운영위원장을 맡았는데요, 아무래도 후원금이 많이 필요하죠. 최근 사업적으로 마음의 여유를 두고 있었는데, 다시 목표를 정해 열심히 뛰어야겠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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