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산] (7) 창녕
보물·민속자료 다수 보유
소원 비는 용선대 유명
뒤편 병풍바위도 멋스러워

관룡사는 관룡산과 구룡산 부속 사찰의 느낌이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수많은 문화재와 빼어난 주변 경치를 지녀 굳이 산행을 하지 않고 다녀가도 알찬 곳이다.

통도사 말사인 관룡사는 신라 내물왕 39년(394년)에 창건했다는 설과 진평왕 5년(583년)에 증법국사가 세웠다는 설이 있다. 삼국통일 후에는 원효대사가 중국 승려 1000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했던 도량이라고도 한다. 조선 태종 1년(1401년)에 대웅전을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후 임진왜란 때를 비롯해 몇 번이나 소실되면서 재건과 보수를 거쳤다.

관룡사는 보물 제212호 대웅전, 보물 제164호 약사전, 보물 제519호 약사전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295호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 등 4점의 보물을 보유하고 있다. 이 밖에 경남민속자료 제6호 관룡사 석장승과 관룡사 해태 법고 받침 등의 독특한 문화재도 눈길을 끈다.

관룡사 뒤편에 펼쳐진 병풍바위.

특히 용선대 불상은 한 가지 소원을 꼭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입학, 취업시험 합격 등을 비는 발길이 끊기지 않는다. 용선대는 극락세계로 건너게 해주는 반야용선(般若龍船)으로 비유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시원한 전망 또한 도심에서 쌓인 체증과 묵은 때를 말끔히 씻어준다. 어쩌면 그 순간이 짧은 극락일지도 모른다.

옥천매표소를 지나 관룡사로 오르는 길 오른편에는 신돈(?∼1371)의 자취가 서린 옥천사(玉泉寺) 터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화왕산 남쪽에 있다. 고려 신돈의 어머니는 바로 이 절의 종이었다. 신돈이 죽임을 당하자 절도 폐사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바로 이 옥천사에서 신돈이 태어났다.

관룡사 약사전 석조여래좌상.

신돈은 고려 공민왕 때 전민변정도감을 만들어 부당하게 빼앗긴 토지와 강제로 노비가 된 이들을 해방하고자 토지제도와 노비제도 개혁을 추진했고 민족의 자주성을 주창했다. 결국, 친원 권문세족과 부패 불교세력의 반발로 신돈의 개혁은 좌절되고 역모죄로 처형당하게 된다. 신돈은 역사의 승리자에 의해 결국 무모하게 개혁을 이끌다 나중에는 주색과 권력을 즐긴 '요사스러운 중'으로 기록됐다.

찾는 이 없어 우거진 숲 속에는 석재만이 나뒹굴어 이곳이 절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더구나 부도, 석등 등 석재 대부분이 잘게 부서져 있어 인위적으로 파손됐음을 알 수 있다.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
관룡사 해태 법고 받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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