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에 담는 것조차 꺼림칙하고 그런 일을 보고 듣는 것도 몸서리치게 하는 일이 요즘 부모된 사람들의 어린 자식에 대한 학대다. 짐승도 죽은 새끼를 끌어안고 젖을 물리며 차마 버리지 못하는데 하물며 자식의 시신을 옆에 두고 부모가 저지른 행동을 보면 이게 사람인가 싶다. 아기를 바닥에 팽개치고 집어던져 죽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 짐승에게 부끄러워 고개 들지 못하겠다. 거기에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런 사람들을 심판하는 우리나라 사법기관의 처벌은 참으로 미약하다.

사람 누구나 남의 일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다. "어쩌면 저럴 수가"하며 발을 굴러도 처음 그때뿐, 내가 맞닥뜨린 일이 아니면 나와 상관없는 일로 무관심하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잊는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내게 아무 일 없다고 안심할 게 아니라 사회에 그늘지고 소외된 외로운 아이나 이웃은 없는지 살펴야 한다. 나 한 사람 나선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느냐며 외면하면 안 된다. 방관과 무관심은 죄악이다. 촛불 한 자루가 밀어내는 어둠의 양이 얼마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불을 밝히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때 언젠가는 지금보다 밝은 세상이 오지 않겠는가.

명말 청초 유학자 장대(張岱)는 "형의 아들이 아플 때는 밤새도록 왔다 갔다 살펴보지만, 돌아와서는 잠깐이나마 편히 잠드는데, 자기 아들이 아플 때는 단 한 번만 가서 들여다보지만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글이 있다. 인간의 사심을 돌아본 엄정한 자기 성찰에 저절로 고개 숙여진다. 그것은 더욱 근원적인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게 하고 보통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을 이야기한다. 우리 몸은 지금 세상에 편하도록 진화되었는데 정신은 거꾸로 퇴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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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도 우리 주변에는 버려진 짐승이나 의지할 곳 없는 병든 사람을 돌보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의 수고가 많은 사람의 외로움을 달래는 따스한 밥이 되려면 노력의 가치를 값 없이 만드는 사회가 사라져야 한다. 한 줌의 선한 삶은 수많은 지식과 지혜를 뛰어넘는다. 이 같은 진실을 알고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 사회는 아직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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