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이 자기 이익에 반하는 후보 찍어
'내 투표로 내 처지 개선됐나'가 화두

며칠 전 등산을 할 때 동료가 이런 말을 했다. "서민들이 자기 처지도 모르고 투표를 하니까 나라가 이 꼬라지가 되지. 계급투표를 해야지 말이야!"

거꾸로 말하면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 때 서민들이 계급배반투표를 했다는 것이다. 자기 계층 이익을 대변하는 후보나 정당을 찍지 않고 다른 계층의 대변자를 찍었다는 말이다.

나도 당시 선거 당일 마산역 광장에서 비슷한 현상을 목격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곳에는 빈곤하고, 나이 들고, 직업 없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그때는 역전시장 현대화사업을 하던 중이라 광장에 가설시장도 있었다.

그때 광장에서, 국밥집에서 만난 유권자들은 대부분 '박근혜'를 찍었다고 했다. 실업자도, 일용직도, 국밥 파는 아줌마들도 그랬다고 했다. 그들은 박정희를 이야기했고, 박근혜를 불쌍한 대통령의 딸이라고 했다.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정당이니 정강이니, 계급이니 계급정책이니 하는 복잡한 개념을 접하기 어려운 처지이긴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언론은 흔히 계급투표니, 계급배반투표니 하는 용어를 쓴다. 재미있는 건 이 용어의 사회학적 배경이다. 사회학에서 '계급의 탈노선(class dealignment)'은 특히 영국에서 정치적 태도와 계급 간의 종래 유형이 붕괴돼 가는 현상을 명제화했다. 노동당에 대한 노동계급이 쇠퇴해가고, 오히려 중간계급의 노동당 지지와 보수당 이외 정당 지지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명제는 단서를 달았다. 계급투표 측정을 위한 하나의 기준선을 제공할 뿐, 반드시 일관성 있고 유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몇 가지 가능성에 주목했다.

우선 계급이나 부문적 관심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을 넘어 또 다른 기준선을 취하는 것, 비육체 노동자의 경우 특정한 부문 간 '계급이익'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 등이다. 배우자나 동료, 주변의 직업적 영향 등 계급에 대한 정의가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배경이 된 이론의 함의나 표면적 현상을 재단하는 데 그치는 용어의 허점을 떠나 나는 계급투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내 처지를 개선시킬 수 있는 투표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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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만들어진 대선인가. 1960년 4·19혁명에 따른 이승만 하야, 1987년 6월항쟁의 결과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처럼 언론이 도화선을 만들고 국민이 촛불로 점화하고, 국회와 사법부가 탄핵으로 단죄해 만든 대선 아닌가.

그래서 냉정하게 되돌아보자는 것이다. 지난번 나의 투표로 내 처지는 개선됐나? 내 아버지와 나의 빈곤, 내 아들딸의 실업과 입시경쟁은 조금이라도 나아졌나? 한 해 1만 5000명이 자살하는 이 나라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개선시킨 투표였나? 두 달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서는 내 처지를 개선시킬 수 있는 투표를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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