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단된 보도연맹 학살 유해 발굴 작업
법 통과로 '빨갱이 낙인' 유족 한 풀어야

여든을 넘긴 할머니는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당시 신혼이던 남편이 갑자기 죽게 된 이야기였다. 무서워서 한 번도 남한테 털어놓은 적 없다고 했다.

"6·25가 나기 전에, 음력으로 6월 초하룻날 아침 6~7시쯤에 갑자기 순경들이 찾아왔어. 남편한테 '박형! 좀 가자' 이라는 기라. 남편은 아무 말도 못하고 국방색 사지 쓰봉에다가 내가 손으로 뜬 난닝구를 입고 순경들을 따라갔어."

그렇게 나간 남편은 며칠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 수소문해보니 경찰서에 있다가 형무소로 옮겼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고 수백 명에 달했다.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던 것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좌익도 우익도 몰라. 그때는 친구들 어깨동무 해가꼬 보도연맹 가입하라고 하모 친구들끼리 보증을 서서 도장만 찍어줬어. 그기 보도연맹인지 뭔지도 모르고 가입을 한 기라. 그때 신랑은 친구들끼리 일도 하고, 갑계도 있고 계군도 있고 했기 때문에 예사로 생각했던 기라."

그러다가 열흘쯤 뒤에 사달이 났다. "유월 열하룻날이라. 해가 지니까 우리를 다 쫓아내고 사람들을 실어 나리더라고. 차 하나 싣고 가면 또 차 들어가고, 또 하나 싣고 가고. 그날 나간 사람이 몇백 명인지 모를 정도라. 그런데 그 차가 어디로 갔나 하면, 전부 용산에 갔다더라고. 용산이라고 형무소 앞에서 더 가면 있는데, 모두 간 사람은 다 죽었다 이런 말이 있었어."

시체는 찾지도 못했다. "시누남편이랑 시동생이랑 여럿이서 죽었어. 한번은 시어머니가 아들을 찾을라고 사람들 많이 죽은 데를 물어서 갔어. 그렇게 찾아 올라가 본께 골짜기에 팔, 다리, 뼈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옷가지도 널려 있더라캐. 비는 부실부실 오고, 할매가 무서버서 도저히 더 못 올라가고 죽을상이 돼서 집에 돌아오고 말았어." 한여름, 이미 부패가 시작된 수백의 '시체산'에서 아들을 찾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2008년 만난 정아무개(당시 81세) 할머니 이야기다. 불안한 눈빛으로 치를 떨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참담한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용산 외에도 진주 금산, 문산 등 비슷한 사례를 얘기한 어르신이 많았다. 당시 들었던 여러 사례는 3년간 5권의 책으로 묶어 발간했다.

지난달 진주 명석면 용산고개 민간인 유해발굴이 시작되었다. 한국전쟁기 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700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진 곳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고 과수원을 조성하면서 땅을 한번 파헤쳤던 곳이라 유해가 많이 손상됐을 것을 우려한 가운데서도 첫 삽을 뜨기 시작하자마자 땅속 10cm 지점에서부터 유골 일부와 유품 등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유해 발굴작업을 하는 것은 정부기관이 아닌 민간단체라 한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공동조사단으로 4·9통일평화재단, 민족문제연구소 등 10여 단체와 함께 유족회가 포함됐고, 자원봉사자와 시민의 후원으로 발굴하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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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 당시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일부 유해발굴을 시작했으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중단된 이후 지금까지 정부 차원의 유해발굴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유족들은 전국 곳곳에 방치돼 있는 유해 발굴에 기대를 걸었다가 좌절했다. 현재 유족들은 여야 국회의원 60명이 국회에 법안 발의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및 피해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의 조속한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들에 대한 진실규명과 복권, 유해발굴 등 과거사 정리에 필요한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 그동안 빨갱이라는 낙인으로 억울함을 감내해야 했던 유족들의 응어리진 한을 다소나마 위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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