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재미 가득 걷는 곳곳 '소풍길'
평일 한낮에 걷는 도심 속 철길
건널목 전봇대에 널어둔 빨래
벽 허물어져 마당이 보이는 집

기차는 오지 않는다. 머리는 알고 있다. 쿵쾅하며 철길이 울린다. 재빨리 고개가 뒤로 돌아간다. 분명 기차는 없다. 햇빛에 반짝이는 철길만 있을 뿐이다.

창원시 진해구 해군통제부 입구 근처 철길에서 아찔한(?) 산책을 시작한다. 철길 양쪽으로 노송이 줄을 지어 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철길 침목에는 글귀를 써놓았다.

시는 진해선 260m 구간에 '감성 철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철길 옆으로 휴식공간도 마련했다. 기차가 달리지 않는 길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셈이다.

진해역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철길이 막혀 있다. '철도운영자 승낙 없이 횡단하거나 출입할 수 없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별수 있나, 잠시 골목으로 선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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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철길 건널목 주변 전봇대를 빨래 건조대로 활용하고 있다./최환석 기자

골목길은 좁다. 막다른 길도 있다. 꾸밈이나 거짓 없이 수수한 공간이다. 소박한 풍경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 예측이 어려운 상황은 때로 쉼표 역할을 한다. 골목에서 막다른 길을 만나면 당황하지 말고 다른 길을 찾으면 된다.

골목을 벗어나자 진해역이다. 지난 1926년 11월 11일 문을 연 역사다. 지금은 아쉽게도 쓰이지 않는다. 지난 2015년 2월 1일 여객 취급을 중단했다. 이곳을 드나들었던 이들 추억도 함께 봉인됐다. 지금은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92호로 역할을 하고 있다.

진해역 가까이 육교가 있다. 여기서 걸어온 길과 가야 할 길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육교 중간 지점에서 넓은 철길을 내려다본다. 기차가 굉음을 내며 달렸을 길이지만 지금은 한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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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일 한낮 철길을 따라 걷는 이들이 많다./최환석 기자

옛 육군대학 터 앞에서 철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경화역으로 향한다. 이번 산책에서는 충장로와 나란히 쭉 뻗은 아래 철길 '사비선'을 택한다.

사비선은 옛 진해화학 전용 화물 철도다. 제4비료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50년대 이후 국가사업 목적으로 진해역과 제4비료공장을 연결하고자 설치한 철도다. 길이는 6.5㎞. 현재는 비료공장을 철거해 운행하지 않는다.

철길을 편안하게 산책하려면 운동화를 추천한다. 자갈이 많아 발이 쉽게 피곤해진다. 굽이 높고 딱딱한 신발도 피하자. 발목을 접질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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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멀리 경화시장이 보인다. 마침 장날이다./최환석 기자

평일 한낮 철길을 따라 걷는 이가 꽤 많다. 아무래도 도심을 그대로 관통하는 지름길이라 그런 듯하다.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면 철길만큼 안전한 길도 없겠다. 위험요소는 기껏해야 개나 고양이 배설물뿐이다.

철길을 따라 걸으면 심심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걸어보면 소소한 재미가 있다. 건널목 주변 전봇대에 누군가 빨래를 널어뒀다. 전봇대가 빨래 건조대 역할을 하는 셈이다. 기상천외한 건조대 선정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셔터를 내린 한 상점 간판도 재밌다. '군것질 좀 해볼까'란다. 속으로 '한번 해봅시다' 답한다. 벽이 허물어져 마당이 훤히 보이는 집이 있는가 하면, 이곳에 건물이 있었음을 알리려는 뜻인지 문만 덩그러니 남은 공간도 있다. 다들 운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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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중앙초등학교 정문 아래 건널목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소원문구슈퍼'가 보인다. 예전엔 경남상회였다는데, 이곳에서 영화 <소원>을 촬영하고 이름이 바뀐 듯하다. 영화 속 주인공 소원이 가족이 살던 공간이다. 영화 속 간판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다시 자박자박 자갈을 밟으며 걷는다. 꼭 마당을 거니는 기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곳곳에 채소 모종이 심겨 있다. 주민들은 철길 공간을 텃밭으로 활용하고 있다. 의자와 탁자를 놓고 진짜 마당처럼 쓰는 이들도 있다.

저 멀리 경화시장이 보인다. 마침 장날이다. 걸음이 무겁다. 역시 시장에서 파는 군것질 앞에 장사는 없다. 오늘 산책은 여기까지.

이날 걸은 거리 3.7㎞. 3321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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