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의 산 : 함께 보라 천상의 설경, 따로 품으라 가슴 속에
통영의 산 : 점점이 떠 있는 '바다의 산'

함께 보라 천상의 설경, 

따로 품으라 가슴 속에

함양의 산

함양은 우리나라 유교 문화의 양대 산맥이다. 경북 안동과 함께 쌍벽을 이룬다는 뜻으로 예부터 '좌(左) 안동 우(右) 함양'으로 불리었다. '선비의 고장'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한 함양 사람은 척박한 자연환경을 탓하지 않는다. 농사지을 땅이 부족하고 1000m가 넘는 고봉(高峰)이 즐비하지만 그 산과 계곡에서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는 고결한 인품'의 선비 정신을 배양했다.

함양의 진산은 읍 시가지를 품은 백암산이다. 널리 알려진 남덕유산, 영취산, 황석산, 백운산과 비교해 높이가 621m에 불과하지만 우뚝 솟은 산세가 범상치 않다. 덕유산과 지리산을 병풍처럼 두른 함양의 산은 힐링과 건강의 터전으로 거듭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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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봉에서 바라본 함양 남덕유산 설경. / 유은상 기자

'겨울 진경(眞景)'의 백미는 역시 눈(雪)이다. 경남의 산 가운데 가장 많은 적설량을 자랑하는 남덕유산(1507m)은 함양에 속해 있다. 기암괴석의 절경과 시원한 파노라마로 남덕유산을 찾는 발길이 사계절 끊이지 않는다. 그 가운데 꼭대기로 이르는 능선 주변에 핀 눈꽃과 상고대는 '천상의 설경'이라 부를 만하다. 4시간 30분~6시간 정도 걸리는 등산 코스 어디로 올라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가쁜 숨을 잠시 멈추고 발아래 펼쳐진 설경을 보고 있노라면 '눈에 담지 말고 가슴으로 품어라. 그래야, 영원히 살아 있다'는 말이 실감 난다. 그러나 욕심은 금물이다. 혼자 즐겨보겠다고 나섰다간 낭패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울 남덕유산은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하는 것이 안전은 물론 감동도 배가된다.

덕유산·지리산이 끌어안은 땅, 그곳에서 사람이 피었네

함양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장이다. 무려 78%가 산지다. 남쪽에서는 지리산이, 북쪽에서는 덕유산이 줄기를 뻗쳐 감쌌다. 그것도 대부분 험한 바위산이라 농사지을 땅이 적다. 함양지역 물가가 은근히 비싼 이유다. 사람이 먹고살고자 기댈 땅은 부족해도 산 골짜기와 계곡 곳곳에는 정자와 누각 같은 유교 문화재가 많다. 김종직, 유호인, 정여창, 박지원 등 출중한 조선의 선비가 많았던 고장이어서다.

함양 진산 백암산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1861)를 보면 백두대간의 덕유산에서 뻗어나 온 줄기가 봉황봉에서 한 번 크게 용을 쓰고 남쪽으로 뻗어내려 간다. 봉황봉은 지금의 남덕유산(1507m)이다. 남덕유를 지난 줄기는 영취산(1075m)을 지나 지금의 함양군 서상면 백운산(1279m)에서 지리산 줄기와 만난다. 백운산에서 동쪽으로 줄기가 하나 뻗어 나가는데, 요즘 지도를 보면 서래봉(1076m), 대봉산 천왕봉(1246m)으로 이어지는 산맥이다. 이 줄기의 중간쯤, 지금 이름으로 도숭산(1041m)에서 다시 작은 줄기가 남북으로 뻗어 나간다. 남으로 향해 제법 길게 뻗어 내린 산맥은 옛 함양의 진산, 백암산(621m)이 된다. 옛 함양은 지금의 안의면, 서하면, 서상면을 뺀 지역이었다. 함양의 읍치(邑治·수령이 거주하는 고을의 중심)는 백암산 아래, 지금의 함양읍 상리 주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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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의 진산 백암산. / 유은상 기자

<1872년 지방지도>, <광여도>, <해동지도> 등 대부분 옛 지도는 함양 고을에서 백운산을 가장 크게 그려 놓았다. 이름 그대로 백운(白雲) 즉, 흰 구름 산이다. 산 정상에 항상 흰 구름이 걸려 있대서 얻은 이름이다. 전국에 백운산이 30좌가 넘는다는데, 덕유산 줄기에서 뻗어 나온 함양 서상면 백운산이 가장 높다고 한다. 남쪽으로는 지리산이 다 보이고, 북쪽으로는 덕유산이 훤히 보이니 그 기백이 남다르다. 함양 읍치를 둘러싼 산은 모두 백운산에서 뻗어 나온 줄기다. 함양 고을의 진산 백암산은 산 중턱에 흰 바위가 있어 얻은 이름이다. 함양읍에서 백암산을 바라보면 오른쪽으로 바위를 망토처럼 두르고 솟은 모양새가 우뚝하니, 과연 한 고을의 진산이겠구나 싶다. 지금도 함양 사람은 백암산 정상에서 새해 일출을 맞이한다.

안의 진산 무이산

조선시대 지도에 나오는 안의는 지금의 함양군 안의면, 서하면, 서상면과 거창군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을 포함하고 있다. 거창, 함양과 분명히 구분되는 독자적인 행정구역이었다. 안의의 원래 이름은 안음이었다. 영조 43년(1767년) 당시 산음 고을에서 7살 된 아이가 아기를 낳았는데, 왕이 이를 불길하게 보고 산음을 산청으로 고치라고 명한다. 이때 옆 고을 안음도 같은 음(陰)자를 쓴다고 해서 안의로 바꾸라 했다. 지명이 안의냐 안음이냐는 조선시대 지도 작성 연대를 추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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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의의 진산 무이산. / 유은상 기자

안의 고을의 진산은 진성산(鎭城山)이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앞서 말한 도숭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나간 줄기가 도착하는 곳이다. 현대 지도에서는 산맥이 북쪽이 아니라 거의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 진성산은 성산(城山)이라고도 했는데, 성이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현대 지도에서는 안의면 월림리에 있는 무이산(475m)이 옛 진성산이다. 중국에 있는 천하절경 무이산(武夷山)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는데, 그곳과 비교를 할 만큼 산세가 빼어난 것 같지는 않다. 안의 고을의 읍치는 무이산 아래 안의면 금천리와 당면리 주변으로 지금도 면사무소가 있다.

안의 고을의 진산은 현재 주민에게 거의 잊힌 산이다. 젊은이도 나이 든 이도 무이산이나 성산, 진성산을 물어보면 모두 처음 들어본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무이산 자체를 산 반대편에 있는 월림마을의 산으로 생각하는 이도 있었다.

황석산과 안의 고을 사람들

안의 고을의 향교는 진산인 진성산이 아니라, 강 건너 황석산(1190m) 아래에 있다. 덕유산과 지리산 모두에 지맥이 연결된 백암산이나 진성산과는 달리 황석산은 남덕유산에서 독자적으로 뻗어 나온 줄기의 끝이다. 함양지역 산세를 오래 살펴온 박갑동 지관은 안의 고을의 주산을 이 황석산으로 본다. 무이산 쪽에서 바라보면 황석산은 화려한 돌산이다. 풍수에서 말하는 화산(火山)이다. 산봉우리가 뾰족하고 멀리서 보면 마치 타는 불꽃처럼 생긴 산을 뜻한다. 실제 황석산 산줄기는 마치 활활 타는 모닥불 같다. 아름다운 화산에서는 뛰어난 문장가나 예술가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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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직 조각상. / 유은상 기자

박 지관은 함양에 인물이 많은 것은 이런 황석산의 산세와 안의 주민의 성품에 기댄 바가 크다고 말한다. 화산 아래 사는 이들은 거칠고도 솔직담백하다. 안의 사람의 성격도 대체로 화통해서 이와 통한다. 조선 전기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당시 안의 사람을 두고 '강하고 사나우며 다투기를 좋아한다'고 적었다. 이런 기질을 잘 다스려 사람들을 교화해 낸 이가 일두 정여창(1459~1504)이다. 조선 후기 편찬한 <여지도서>에는 '정여창이 고을의 원을 지내고 나서, 유현이 배출되어 풍속이 크게 변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천유학자로 불리는 정여창은 실제 안음현감을 지내는 5년 동안 고을 백성을 위해 부역을 줄이고, 노인에게 봄가을에 잔치를 베풀었으며, 똑똑한 아이를 모아 손수 글을 가르쳤다. 정여창이 정한 고을을 다스리는 규칙은 이후 80년 동안 지켜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함양에서 인물이 나도 주로 옛 안의 지역에서 많이 난다는 게 박 지관의 설명이다. 그는 '안의 송장 하나가 거창 사람 열을 당해낸다'는 옛말을 소개했다. 안의 지역 인물이 그만큼 유달리 출중하다는 뜻이다.

'작은 히말라야' 남덕유산 눈도 마음도 탁 트이네

남덕유산(1507m)은 경남에 속한 덕유산 제2봉이다. 덕유산은 1975년 오대산과 함께 10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고 경남 함양과 거창, 전북 무주와 장수 등 2개 도 4개 군 219㎢에 펼쳐져 있다. 주봉인 북덕유 향적봉(1614m)에서 시작한 능선은 남서부 방향으로 20㎞가량 뻗어가다 마침내 경남으로 넘어와 남덕유산에서 방점을 찍는다.

'희미해진' 경남의 산

남덕유산은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와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전북 장수군 계북면 원촌리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문헌과 고지도를 찾아보면 황봉, 봉황산, 봉황봉으로 혼용해 사용됐다. 넉넉하고 덕이 있다고 해 덕유산(德裕山)이라 했고, 연봉 남쪽 끝자락에 있어 남덕유산으로 고쳐 불렸다.

산 정상부 위치와 가장 쉽게 오를 수 있는 등산로는 함양에 있다. 함양군은 남덕유산 운해를 함양 8경으로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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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덕유산 정상으로 가는 길에 상고대가 가득 피어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 유은상 기자

남덕유산은 지리산, 가야산과 함께 경남 3대 산지형 국립공원 중 하나이다. 하지만 남덕유산을 대하는 경남 사람의 생각과 애착은 지리산과 같지 않다.

왜 경남 사람은 지리산만큼 남덕유산에 애착을 가지지 않을까.

우선 덕유산 전체의 주봉인 향적봉이 전북 무주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레저 관광지로 유명한 무주리조트 이미지에 덮여버린 점도 원인으로 분석된다. 경남도를 포함해 지자체의 관심과 홍보 노력 부족도 작용했다고 보인다.

지리산 역시 3개 도(경남·전남·전북), 5개 시·군(산청군·함양군·하동군·구례군·남원시)에 걸쳐 있다. 경남뿐 아니라 다른 지자체도 경쟁적으로 지리산을 활용하고 홍보하느라 여념이 없다. 덕유산과는 다른 모습이다.

보존이 잘 된 지리산은 개발 잠재력이 엄청나지만, 덕유산은 이미 스키장, 골프장, 곤돌라 등이 설치돼 추가 개발 메리트가 적은 탓일 게다.

남덕유산은 경남에서 지리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지만 빼어남으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이다. 경남의 산이라는 인식과 그 순수한 가치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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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덕유산 정상. / 유은상 기자

'겨울 왕국', '작은 히말라야'

남덕유산은 토산으로 된 대부분 소백산지와는 달리 산 아래는 토산, 정상부는 석산으로 이뤄져 있다. 덕분에 풍부한 생태자원을 품은 동시에 월악산, 속리산처럼 화강암이 분포하면서 빼어난 경치를 뽐낸다.

꼭대기로 이르는 능선에는 칼같이 뾰족한 암릉이 발달해 아찔한 계단을 피할 수 없다. 스릴을 느낄 수도 있지만 '헉, 헉' 신음이 절로 난다. 그러나 상하로 첩첩이 쌓이고, 좌우로 360도 펼쳐진 일망무제의 산그리메는 금세 신음을 '와∼' 하는 감탄으로 바꿔놓는다.

기암괴석의 절경과 시원한 파노라마가 남덕유산의 기본 메뉴라면 철 따라 맛과 멋을 달리하는 계절 메뉴도 예사롭지 않다.

늦봄이면 향적봉으로 이어지는 20㎞ 능선에 수놓은 철쭉 군락이, 여름이면 싱그러운 숲과 함양 화림동 계곡·정자, 거창 월성계곡이 사람을 불러 모은다. 가을철에는 울긋불긋 단풍으로 차려입고, 겨울에는 설경과 상고대로 단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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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덕유산 주능선. / 유은상 기자

특히 아름다운 설경은 남덕유산이 '겨울왕국', '작은 히말라야'라는 별명을 가지게 했다.

북동에서 남서로 가로지르는 험준한 산맥은 국경이 되기도 했고 영·호남을 가르는 경계가 되기도 했다. 겨울철에는 서해의 눈구름을 가로막아 눈으로 바꿔놓는다. 지리산보다 더 많은 눈이 쌓이면서 설악산 등 더 춥고 높은 곳으로 가지 않고도 남부지역에서 쉽게 눈을 접할 수 있는 곳이 됐다.

최근 향적봉은 곤돌라 때문에 인산인해를 이루며 몸살을 앓고 있다. 여기에서 다소 비겨난 남덕유산은 여유롭고 아름다운 설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남덕유산 등산로는 △영각사∼남덕유산 정상∼영각사 하산(4시간 30분) △육십령고개∼할미봉∼남덕유산 정상∼영각사 하산(5시간 30분) △거창 북상면 명천리 버스 종점∼삿갓골재∼월성재∼남덕유산 정상∼영각사 하산(4시간 30분) 코스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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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재로 아담하게 정비된 참샘.
등산로에서 150m가량 비켜나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 유은상 기자

경남의 젖줄 남강 발원지 '참샘' 남덕유산서

낙동강을 경남의 대표 강으로 꼽지만 오롯이 경남의 강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남강이 더 경남스러운 강이다.

남강은 경남 서북부 끝자락에서 발원해 경남 동부지역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그 속에 경남인의 삶과 문화,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흐른다.

유역면적 3467㎢, 길이 189㎞의 남강은 남덕유산 참샘에서 시작한다. 영각재에서 남덕유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 아래쪽에 있다. 등산로에서 150m가량 비켜나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사각의 석재 틀로 아담하게 정비한 샘물 옆에는 한국수자원공사에서 설치한 안내판이 서 있다.

남강 발원지 안내판은 지리산 천왕봉 아래 천왕샘에도 있다. 이 탓에 혼란과 논란을 빚기도 한다. 해발 고도에 따른 상징성은 천왕샘에 있을지 모르지만 진짜 발원지는 남덕유산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참샘의 물은 주변의 물을 모으고 또 다른 하천의 물까지 포용하면서 세력을 넓혀간다. 서상면 방지교에서부터는 국가하천 남강을 이루어 거창 백운산에서 발원한 위천과 합류한다. 덩치를 키운 물줄기는 지리산에서 발원한 엄천을 만나 산청군 경계에서 남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결국, 이 물줄기는 천왕샘에서 시작한 덕천강을 진주 진양호에서 품고 의령, 함안을 거쳐 창녕군 남지에서 낙동강과 어우러진다.

남덕유산 기운 품은 문태수 의병장 생가

남덕유산 자락은 항일 의병을 이끈 문태수(1880~1913) 의병장이 태어나고 활동한 곳이다.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에서 태어난 문 의병장은 1907년 정미조약 체결로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의병을 일으켰다.

서울 진격을 계획하다 좌절되면서 덕유산을 근거지로 활동했다. 그는 100명 안팎의 의병을 인솔해 무주, 장수 일대에서 주요 시설을 습격하고 일본 헌병과 교전을 펼쳤다. 한때 충북 영동과 청산, 옥천까지 이동해 활동하지만 다시 덕유산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면장의 밀고로 일본군에 붙잡혀 대구 감옥에서 숨졌다. 정부는 1963년 문 의병장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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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태수 의병장 생가. / 유은상 기자

문 의병장 집터(서상면 상남리 1027·1028번지)는 덕유산 등산로 출발지이자 그가 일본군에게 붙잡힌 영각사에서 동남쪽으로 약 1㎞ 떨어진 곳에 있다.

집터는 잘 정비돼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인근에는 복원된 생가와 사당이 세워져 그를 기리고 있다. 이곳은 남덕유산을 병풍처럼 등지고 앞으로는 서상면 일대의 시원한 전망을 마주하고 있다. 풍수에 문외한인 일반인이 봐도 명당에 가깝다고 느낄 만하다.

점점이 떠 있는 '바다의 산'

통영의 산

'예향(藝鄕)' 통영은 바다의 도시다. 아름다운 항구는 세계 3대 미항으로 불리는 나폴리를 닮았다고 해서 '한국의 나폴리'로 부른다. 통영(統營)이라는 지명도 조선 수군의 상징인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에서 유래했다. 통영시의 옛 명칭인 충무시(忠武市)도 이순신 장군의 시호인 '충무공(忠武公)'이 그 연원이다. 섬(島)도 빼놓을 수 없는 통영의 매력이다. 유·무인도를 모두 합쳐 570개의 섬이 서로 다른 모습을 연출한다.

바다를 품은 통영의 산은 특별하다. 산림청이 선정한 대한민국 100대 명산에 이름을 올린 미륵도 미륵산과 사량도 지리산(지리망산)의 조망은 압권 그 자체다.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둘러보고는 '미륵불이 오실 곳'이라 말한 데서 유래한 미륵산은 영험함을 품고 있다. 360도 어디를 둘러보아도 은빛 바다가 펼쳐진 사량도 지리산은 등산 마니아라면 반드시 올라야 하는 산이다. 천 길 낭떠러지에 다리가 후들거리지만 저 멀리 시선을 한곳으로 모으면 지리산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이것이 '지리망산(智異望山)'으로 부르는 이유다.

'명산(名山)에는 대찰(大刹)이 있다'는 옛말처럼 고찰 안정사(安靜寺)를 품은 벽방산은 통영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이곳에서 시작한 산줄기는 천개산, 도덕산, 제석봉을 거쳐 통제영의 주산인 여황산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벽방산을 '통영의 조산(祖山)'으로 부른다. 바다가 있어 더 특별한 통영의 산으로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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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륵산 다도해. / 유은상 기자

조선 수군기지 켜켜이 감싸 안은 통영의 산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다!' 섬 여행가이자 통영을 사랑하는 강제윤 시인의 말이다. 통영은 조선 수군의 본부인 통제영 (統制營)에서 나온 이름이다. 우두머리는 삼도수군통제사였다. 종2품 관직으로 무인으로서는 최고 벼슬이다. 당시 관찰사(오늘날 도지사)와 같은 관품이었다. 경상도 고성 땅에 속했지만 '고을 원님보다 높은 통제사 나리'가 다스리던 곳. 경상·전라·충청도(삼도)를 포함한 전국에서 군인과 기술자들이 모여 살았던 곳. 통영은 경상도의 한 고을이 되기에는 너무 역동적이었다.

고을 자체가 군사기지였으므로 조선시대에도 따로 진산을 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병관을 중심에 두고 봤을 때 통제영을 감싸 안은 산세는 명확하다. 통영 하면 대개 미륵산(461m)을 떠올리나, 풍수적으로 이 산은 객산(客山)이다. 주산(主山)은 세병관 뒤편, 현재 북포루가 서 있는 여황산(174m)이 되겠다.

옛 지도로 본 통영

조선시대 지도 중에 통영, 즉 통제영 지도가 따로 없는 것이 많다. 대부분은 고성 지도 하단에다 통영을 그려 놓았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엄연히 고성현에 속한 까닭이다.

옛 통영 지도는 통제영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해 놓아 주변 산세를 자세히 알기가 쉽지는 않다. 개중에 제법 재밌는 통제영 지도가 있는데, <1872년 지방지도>에 포함된 것이다. 이 지도는 조감도를 보는 것처럼 정밀하게 통제영과 그 주변 산세를 묘사했다. 특히 세병관을 중심으로 그 뒤편 북표루(현 북포루)와 지금 동피랑 자리인 동표루(동포루), 서피랑 자리인 서표루(서포루)가 성곽으로 연결돼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확실히 통제영은 여황산을 주산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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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피랑 전경. / 유은상 기자

통영 주변 산줄기를 제법 잘 그려 놓은 것은 <해동지도>의 고성현 지도다. 여황산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길게 뻗어나간 산줄기 우백호가 되겠는데, 오늘날 천함산(천암산·258m)이다. 여황산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간 좌청룡은 오늘날 이순신공원이 있는 망일봉(148m)이다. 거북선이 줄지어 정박했을 선창과 그 앞바다를 감싼 산줄기 중 동쪽의 것은 지금의 남망산(72m)이다. 서쪽 줄기는 지금의 항남동 일대다.

여황산과 동피랑·서피랑

통제영을 감싼 산줄기는 대부분 고성군과 통영시의 경계에 있는 벽방산(650m)에서 뻗어 나왔다. 벽방산에서 시작한 산맥은 천개산, 도덕산, 제석봉을 거쳐 여황산으로 이어진다. 여황산의 토박이 지명은 '안뒷산(안띠산)'. 풀이하자면 '통제영 뒷산' 정도가 되겠다.

여황산이란 이름은 임진왜란 이후에 얻은 것으로 보인다. '여황'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임금이 아끼던 호화롭게 장식한 배를 말한다. 통제영의 주산에 걸맞은 이름이다. 높지 않은 산이라 20~30분 걸음이면 정상 북포루에 가 닿는다. 등산로는 조용하고 편안하고 정갈해 산책이나 운동을 하는 이들이 많다. 옛 영광은 사라지고 이제는 점잖고 얌전하며 차분한 느낌이 드는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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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피랑에서 본 동피랑의 풍경. / 유은상 기자

여황산에서 뻗어나간 또 하나 큰 산줄기 아래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렬사가 있다. 이곳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산세를 형성하고 있어 기운이 남다르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충렬사에서 간절히 기도하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말이 돈다고 한다.

통제영을 직접적으로 감싼 산은 동피랑과 서피랑이다. 각각 동쪽 벼랑, 서쪽 벼랑에서 나온 이름이다. 좁은 의미에서 이들을 좌청룡, 우백호로 보는 이들도 있다. 동피랑은 이미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다. 벽화 덕분이다. 하지만, 옛 통영의 실제 번화가는 서피랑 주변이다. 서피랑은 이제야 서서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서피랑 정상에 있는 서포루에 오르면 세병관을 포함한 옛 통제영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피랑지기이자 통영시 문화해설사인 이장원 씨는 풍수적으로 서피랑을 거북이 머리로 보는 이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때 여황산은 거북이 등, 동피랑은 왼쪽 다리다. 거북이가 고개를 들고 바다를 향해 가는 형국이다. 그래서 고개에 해당하는 서피랑이 곧 흥하게 될 것이라는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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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황산과 세병관. / 유은상 기자

주산을 압도하는 객산, 미륵산

미륵산은 환경부가 선정한 국립공원 대표경관 100경에 선정될 정도로 수풀과 계곡, 기암절벽이 수려한 산이다. 산 정상 바로 아래까지 운행하는 한려수도 조망케이블이 생기면서 통영 하면 떠오르는 대표 산이 됐다. 미륵산이라는 이름은 신라 원효대사가 이 산을 둘러보고는 앞으로 미륵불이 오실 장소라고 말한 데서 비롯했다.

미륵산은 풍수에서 말하는 화형, 수형, 목형, 토형, 금형 산세를 고루 지니고 있다. 이런 산세가 통영을 예술적인 기운이 가득한 곳으로 만들었다고 풍수가들은 해석한다. 다만, 객산인 미륵산이 주산인 여황산을 압도하고 있어 '통영 사람은 외지로 나가야 성공한다'거나, '통영에서는 외지 사람이 더 성공한다'는 말이 나온다. 예컨대 통영 토박이인 소설가 박경리나 음악가 윤이상은 바깥으로 떠돌며 명성을 얻었다. 반대로 외지인인 화가 이중섭과 시인 백석은 통영을 다녀가며 큰 흔적을 남긴 것도 이런 관점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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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륵산과 다도해. / 유은상 기자

어떻게 보면 미륵산은 통제영을 등지고 돌아서 있다. 반대로 바다를 바라보는 미륵산이 두 팔을 뻗어 소중하게 감싸는 곳이 인물 많기로 유명한 명당 야솟골(금평마을)이다. 한자로는 대장장이 야(冶)를 써 야소(冶所), 또는 화살 시(矢)를 써 야시(冶矢)골이라 하는데, 화살을 만드는 대장간이 있던 곳이란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미륵산 바로 앞바다에 당포진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당포해전이 벌어진 곳이다.

미륵산 정상에서 보면 산줄기가 야솟골을 품은 모양새가 뚜렷하다. 마을 서쪽에 있는 미륵산의 끝 등성이를 독뫼(獨山) 또는 산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뫼(東山)라고 하는데, 박경리 묘소가 있는 바로 그 산이다. 미륵산 정상에서 만난 문화해설사는 이 독뫼가 옛날 탈곡기로 벼를 수확할 때 탈곡기 앞에 수북이 쌓인 나락 형상이라는 풍수가의 해석을 들려줬다. 그만큼 따뜻하고 풍성한 동네라는 뜻이다.

통영의 산, 낮지만 하늘 찌르는 결기

통영 사량도는 그 자체로 훌륭한 섬이지만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지리산(지리망산) 덕분이다.

지리산의 명성은 '한국 100대 명산', '통영 8경', '매년 40만 명이 찾는 섬' 등의 수식어에서 대략 살필 수 있다. 고작 400m밖에 되지 않는 산이 사람을 불러 모으는 매력은 무엇일까.

기암괴석의 절경, 시원한 바다 전망, 짜릿한 산행의 묘미, 섬으로 떠나는 낭만, 하루면 적당한 일정, 산과 섬에 서린 역사와 전설 등 많은 조건과 원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백문이불여일견', 직접 올라 몸소 느껴야만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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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녀봉 가는 길. / 유은상 기자

뱀 같은 해협이 흐르는 사량도

사량도는 통영시의 가장 서쪽 해역에 있는 섬으로 동강(桐江)이라는 1.5㎞의 잔잔한 해협을 사이에 두고 상도와 하도가 나란히 누워 있다. 모두 927가구 158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섬에는 패총이 발견된 것에서 미뤄보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태풍에도 안전한 정박 여건과 영남과 호남을 잇는 수로에 위치한 까닭에 고려 때부터 수군이 주둔했다. 고려 말에는 왜구를 막고자 최영 장군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머무른 흔적과 기록도 남아 있다.

사량도의 옛 이름은 '박도'였지만 조선 초기 '사량'으로 바뀌어 쓰인다.

'사량'은 동강 물길이 뱀처럼 가늘고 구불구불하게 생겼다고 해서 뱀 사(蛇)에 해협을 뜻하는 들보 량(粱)을 사용해 불렀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밖에도 섬에 뱀이 많아서, 뱀처럼 생겨서, 옥녀봉 애절한 전설에서 '사랑(愛)'이 '사량'으로 바뀌었다는 설 등이 있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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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에서 본 옥녀봉. / 유은상 기자

상상 그 이상을 선사하는 지리산

상도에 있는 지리산(398m)은 육지 지리산(智異山) 명성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섬 중앙에는 더 높은 달바위봉(불모산·400m)이 있지만 지리산은 이를 제치고 사량도 대표 산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 이름 또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애초 지리산은 돈지(敦池)마을과 내지(內池)마을 중간에 있어 지리산(池里山)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외지 사람은 멀리 지리산이 보인다 해서 '지리망산(智異望山)'으로 바꿨고, 결국 최근에는 육지의 산과 한자까지 똑같은 지리산(智異山)으로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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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기만 해도 아찔한 사량도 지리산 바위 능선. / 유은상 기자

산행은 돈지에서 시작해 지리산∼달바위∼가마봉∼옥녀봉∼면사무소로 이어지는 8㎞, 4시간 코스가 대표적이다.

숲길을 30분가량 올라 능선에 서면 하늘이 열리고 바다 전망이 펼쳐진다. 돈지항과 남해 창선도, 삼천포 화력발전소, 고성 상족암, 통영 오비도, 하도 등의 풍경이 고개를 돌리는 방향에 따라 순서대로 머릿속에 각인된다. 지리산 정상에서는 멀리 눈 쌓인 지리산 천왕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높지 않다고 만만하게 보거나 풍경에 매료돼 경계심을 풀어서는 안 된다. 달바위를 거쳐 옥녀봉에 이르는 길은 또 다르다.

공룡 등뼈처럼 뾰족뾰족 일어선 바위능선은 네발로 기어서 오르내릴 수밖에 없다. 또 좌우로 날카로운 직벽 위를 걷자면 천길 바다 위에서 작두를 타는 듯 등골이 오싹하고 오금이 저린다. 밧줄을 잡고 내려서는 구간과 앞으로 쏟아질 듯한 경사진 계단을 몇 번 오르내리자면 마치 유격 훈련을 받는 느낌도 든다.

최근에는 출렁다리, 덱, 철계단, 로프, 우회 등산로가 만들어져 한결 수월해졌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면사무소∼옥녀봉의 2시간 코스도 괜찮다.

슬픈 전설 서린 옥녀봉

절경을 자랑하는 옥녀봉에는 슬픈 전설이 얽혀 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를 여읜 옥녀는 이웃 홀아비의 보살핌으로 자란다.

하지만 옥녀가 어여쁜 처녀로 성장하자 의붓아버지 눈에는 여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는 욕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옥녀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이때 옥녀는 뒷날 새벽 상복에 멍석을 쓰고 송아지 울음소리를 내면서 기어서 산에 올라오면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설마 그럴까 싶어 꺼낸 이야기였다.

그러나 의붓아버지는 뒷날 산에 올랐고 그 모습을 보고 절망한 옥녀는 천륜을 지키고자 천 길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진다.

지금도 옥녀봉 밑 붉은 이끼는 옥녀의 피라고 전해진다. 이후 이곳 사람들은 옥녀봉이 보이는 곳에서는 신랑 신부 맞절을 하지 않았다. 신부가 가마를 타고 가다가도 옥녀봉 아래서는 걸어서 가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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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 지킴이 정경표 씨. / 유은상 기자

"사량도 찾고부터 일이 술술 풀려"

사량도 정취에 매료된 정경표(55) 씨는 9년 전 섬에 들어와 일주 관광버스를 운행하면서 섬 지킴이, 관광해설사, 산악구조대로 1인 다역을 하고 있다.

정 씨는 "뭔가에 끌려 꼭 이 섬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며 "통영서 시내버스 기사를 하다 사량도 마을버스 기사를 모집한다기에 응시해 선발됐다"고 섬과의 인연을 설명했다.

이어 "관광객에게 섬의 매력을 알리고 싶었지만 마을버스 기사로는 한계가 있어 일주 관광버스를 운행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정 씨는 이 섬 최고 매력은 지리산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360도 바다 전망을 보면 가슴이 확 트이면서 좋은 기운이 들어찬다"며 "동시에 설악산 공룡능선이라든지 그런 곳에서 느끼는 스릴을 2시간에서 4시간만 할애하면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자랑했다. 덧붙여 "개인적으로 이곳에 온 뒤에 자식 취업은 물론 모든 일이 잘 풀렸다"며 "고마운 마음에 등산로에 돌탑을 쌓고 등산객 쉼터를 조성해 예쁘게 꾸미고 있다"고 말했다."

바닷물 채우니 통영 산은 섬이 되었다

미륵도에 있는 미륵산이나 사량도에 있는 지리산을 빼고도 통영 섬에는 괜찮은 산이 많다.

사량도에는 지리산 말고도 아랫섬에 있는 칠현산(349m)도 가봄 직한 곳이다. 한산도에 있는 망산(293m) 등산로에서는 바다 조망과 등산, 충무공 유적 답사를 한 번에 할 수 있다.

높지는 않지만 욕지도에 있는 천황산(392m) 등산로나 연대도의 연대봉(220m)에 오르면 후련하게 탁 트인 바다를 볼 수 있다. 특히 천황산은 울창한 숲으로 유명해 한여름에도 시원하게 등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군사시설이 있어 정상에는 가지 못한다.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 연화도 연화봉(212m)도 트레킹 코스로 인기가 있다.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섬은 곧 산이다. 바닷물이 없다고 상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통영에는 2013년 기준으로 섬이 570개 있다. 유인도가 43개, 무인도 527개다. 바다 위에 600여 좌의 산이 펼쳐져 있는 셈이다. 어느 섬이면 어떠랴. 아무 언덕이나 정상에 올라보면 그윽한 남쪽 바다가 눈 아래 펼쳐질 것이다. 하여 섬은 곧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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