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인력거 타고 통영 골목골목 숨은 근대문화 여행 떠나볼까

이승민(47) 씨는 빨간 인력거를 몰고 강구안 골목을 누빈다. 강구안에는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다. 이곳 토박이기도 하지만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인력거 덕이다. 승민 씨의 별명은 '통영라이더'. 그는 여행객들을 인력거에 태우고 통영 골목골목 여행을 다닌다. 골목에서 마주치는 것들은 모두 그의 이야깃거리다. 그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눈앞의 낡은 골목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강구안 앞이 매립되기 전 골목 앞까지 푸른 물이 넘실대던 모습, 통영에서 꽃 피어난 예인들의 지나다녔을 북적이는 거리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꼭 한 번 타봐야지' 했던 승민 씨의 인력거에 올라탔다.

최첨단 인력거 타고 떠나는 근대골목여행

전혁림 그림 속 바다색을 푼 듯한 하늘이었다. 눈앞의 통영은 곳곳이 그림이다. 다만 가만히 있어도 몸이 움츠러드는 겨울바람이 인력거를 앞에 두고 조금 긴장하게 했다. 운전석에 앉은 승민 씨 뒤 승객석에 앉아 담요를 덮었다. 45분 정도 걸리는 가장 대표 코스 '인력거 A코스'를 예약했다. 통영 강구안 안쪽 골목길에서 시작해 항남동, 병선마당, 동피랑 입구를 돌다 다시 강구안 골목길로 되돌아오는 왕복 코스다. 승민 씨가 힘껏 발을 구르자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인력거를 끄는 자전거가 앞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2013년 10월에서 2014년 1월까지 진행한 '강구안 푸른골목만들기' 사업으로 새 단장한 골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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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라이더 이승민 씨. / 서정인 기자

"강구안항은 통영의 얼굴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육로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 배를 타고 통영으로 와 첫발 딛는 곳이 강구안항이었어요. 부산·마산에서 삼천포·여수 등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기착지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고요. 그때 번성했던 이 골목길을 간판 정비하고 의자 등 필요한 것을 설치했어요. 골목을 차 없는 거리로 만들었고 한 달에 두 번 둘째·넷째 토요일에 프리마켓이 열려요."

골목에는 통영에 남아있는 대장간 두 곳 중 하나가 있다. 벌건 불 앞에 선 대장장이와 농기구가 주렁주렁 걸린 풍경은 옛 대장간 모습 그대로다. 사람들 발길이 모이고 떠나는 곳이라면 꼭 있어야 했던 여인숙의 흔적도 골목 곳곳에 남아있다.

"이 골목길은 일제강점기에 매립해서 형성한 곳이에요. 아파트 5층 높이 산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전부 깎아내고 매립해서 일본인들이 사용했죠. 1906년부터 매립과 개발을 시작했어요. 일제강점기 골목 그 자리에 바로 여러분이 계신 거예요. '항구 항(港)', '남녘 남(南)' 자를 써서 항남동이라고 하고요. 강구안 전체, 서호동, 항남동, 동호동… 서울로 치면 명동 정도 번화가였어요. 1980년대 중반까지 아주 번성하고 화려했죠."

인력거는 골목길 벽 백석의 시가 있는 곳에 멈췄다. 통영에서는 백석의 시를 자주 마주할 수 있다. 통영 출신도 아닌 백석을 통영 사람들이 이토록 그리는 이유는 뭘까. 80여 년 전 백석은 사랑하는 여인을 보기 위해 통영을 찾곤 했다.

"백석은 한 통영 여인을 사랑했어요. 1936년인 것 같아요. 당시 통영에서 이화여고로 유학 간 박경련이라는 18세의 여학생을 보고 첫눈에 반하죠. 조선일보 기자였던 신현중이라는 백석의 친한 친구가 '난'이라고 불린 박경련을 소개해주죠. 혼자 짝사랑했다는 얘기도 있는데 어쨌든 사랑했어요. 그래서 백석은 통영을 수차례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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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라이더 이승민 씨. / 서정인 기자

(전략)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령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 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 객줏집의 어린 딸은 난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던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 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후략)

- 백석 '통영(統營) 2' -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어요. 친구 신현중이 배신을 합니다. 신현중은 약혼녀가 있었음에도 약혼녀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박경련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백석의 어머님이 기생 출신이 아닌데 기생 출신이라는 얘기를 흘려 혼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고 본인이 난과 결혼하죠. 백석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백석을 만난 후 다시 인력거는 골목을 달린다. 직접 공기와 맞닿기 때문인지 최고 20km 정도일 것 같다는 속도에도 제법 달리는 재미가 느껴진다.

"동양장이라는 모텔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사카이시'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던 통영 최초 호텔이었습니다. 해방 후에 신한호텔로 이름이 바뀌죠. 백범 김구 선생부터 해서 주요 인사분들이 통영에 방문할 때마다 여기 묵으셨죠. 많이 변해서 현대식처럼 보이지만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입니다."

곧 푸른색 가옥 앞에 멈췄다. 골목길 여행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후 지금까지 남아있는 적산가옥(해방 후 일본인이 남겨놓고 간 집이나 건물)과 그에 담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는 여행이기도 하다.

"파란 건물 보이시죠?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청루(靑樓)'라고 하는, 기생이 있던 술집이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해방 이후 민가로 사용되기도 했고요. 통영은 나전칠기가 유명하지 않습니까. 옛날 나전칠기를 가르치던 경남도립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였기도 해요. 화가 이중섭과 깊은 인연이 있는 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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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 건너에서 바라본 동피랑 마을./ 서정인 기자

이중섭은 일본인 아내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과 한국전쟁으로 피난길에 오른다. 아내와 두 아들, 조카와 부산에서 한 달을 보낸 후 제주도로 간 이중섭 가족. 서귀포에서 작은 방 한 칸에서 모여 살았지만 가족과 함께였기에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 후 이중섭 가족은 다시 부산으로 왔지만 1952년 생활고 때문에 결국 아내는 두 아들과 일본으로 떠나죠. 부산에 남은 이중섭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니 온갖 험한 일을 하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죠. 그때 이중섭 함경도 고향 선배라 할 수 있는, 이곳 기술원의 유강렬 강사라는 분이 이중섭에게 통영에 오라고 합니다. 이중섭이 통영에 왔을 때 앞에 보이는 이런 건물들은 없었고 바로 바다였죠. 아름다운 경치에다가, 지친 이중섭에게 가장 좋았던 것은 소통할 수 있는 통영의 많은 예술인들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또 통영 민선시장이었던 김기섭 시장이라는 분이 이중섭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지원을 해줍니다. 그때 나온 작품들이 이중섭의 '황소', '흰소', '달과 까마귀',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이중섭이 통영에 2년간 머물렀다고 알려져 있는데 따져보니 2년은 아니고 9개월에서 10개월 정도, 전시하고 통영을 오간 게 1년 반 정도죠. 결국 안타깝게 돌아가시긴 했지만 아마 이중섭도 통영에서의 시간을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이 건물도 매각한다, 안 한다 그러는데 안타깝죠. 보존이 잘 되었으면 해요."

승민 씨의 해설에는 고향 통영에 대한 자부심이 뚝뚝 묻어난다.

"우리 통영은 흉내 내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고유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곳이에요. 그래서 윤이상, 박경리, 유치환, 유치진, 김춘수, 전혁림…. 걸쭉한 예술인들이 태어났죠."

통영이 품었던 예인들을 만난 후 본격적으로 적산가옥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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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라이더 이승민 씨. / 서정인 기자

"여기는 제가 초등학생 때 2층 다다미방에서 공부도 했던 곳이에요. 여기는 옛날 세관인데 예전에는 작은 1층 형태였어요. 담벼락에 무화과나무가 있었고 바로 앞이 바다였어요. 바닷물이 들락날락하고, 바다 표면에는 플랑크톤이 반짝반짝하고, 동네 형들이 수경 하나만 쓰고 바다에 들어가면 멍게·해삼·꽃게가 바로 잡혀 올라왔죠. 지금 개발을 해서 엉망이 되었어요. 울타리 때문에 바다도 안 보이고요. 407억이라는 돈을 들여서 전혀 쓸모없는 공간을 만들어놨죠. 차라리 여기 옛 건물들을 보존했으면 군산 못지않게 근대문화 자산이 많은 곳이 되었을 거예요."

골목길을 벗어났다. 항을 두르는 해안도로를 따라 인력거가 달린다. 이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느껴진다. 다음은 동피랑이 바다 건너로 보이는 곳에 멈춰 섰다.

"통영은 1604년 6대 통제사 이경준 통제사에 의해 통제영이 됩니다. 1대 통제사가 이순신이죠. 여기가 진해 해군 사령부 같은 곳이 됐다는 거죠. 전라도·경상도 남해안 바다 전체를 아우르는 조선 수군의 총사령부가 여기였어요. 그때부터 통영은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통영으로 들어오는 '원문'이라는 고개를 차단하면 산을 넘거나 바다를 건너지 않는 이상 통영을 오갈 수 없었죠. 일본하고 가까워서 군사적으로 요충지였고요. '삼도수군통제영'이라고 하죠. '삼도'는 충청도·경상도·전라도 세 곳이에요. '수군'은 해군. '통제영'은 통제사가 있던 조선 수군의 본부죠. 곧 '삼도수군통제영'의 줄임말이 통영이죠. 1995년 이전까지 이충무공의 시호를 따서 충무시라고 불렸는데 이후에 통영이라는 이름을 따왔죠."

다음에 향한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선박 관련 물건들을 보관하던 창고라고 했다. 창고 안 시간은 그대로 멈춰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창틀, 지붕 다 그대로예요. 관리인은 아니지만 이중섭 공방과 제가 살피고 있어요. 누군가 와서 훼손할 수도 있고 불조심도 해야 하니까요. 인력거 손님들에게만 공개하고 있죠."

어느덧 45분이 흘러있었다.

"여름에는 안 추우니까 해안선을 주로 따라서 가요. 손님들 자리에 캔맥주도 하나씩 꽂아서요.(웃음)"

음악 좋아했던 끼 많은 청년, 인력거에 앉다

승민 씨는 통영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그가 대학에 간 것은 순전히 음악 때문이었다.

"아까 함께 둘러본 항남동이 유년시절에 자라고, 뛰어놀던 곳이에요. 그때 최고 중심가였죠. 대학을 부산으로 갔는데 전공은 환경관리과였어요. 공부에 관심이 없었는데 대학 간 이유는 노래에 관심이 많아서였어요.(웃음)"

지금이야 무수히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지만 당시에는 강변가요제, 대학가요제에 나가는 것이 제일이었다.

"노래에 늘 관심이 많았어요. 친구들 앞에 나가서 부르기도 하고…,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건 대학 때죠. 통기타 서클에 들어갔거든요. 기타를 대학 때부터 쳤는데 솔직히 잘 치는 건 아니에요.(웃음) 제 느낌대로 치고 느낌대로 부르는 거죠."

음악은 지금 그에게 취미로 남았다. 그가 꾸렸던 카페인 '라이더 다방 홍'(지금은 접고, 다른 곳으로 이전을 준비 중이다.)에서는 늘 기타 소리, 노랫소리가 흘러나왔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버스킹을 하기도 하고, 통영에서 열리는 촛불집회 현장 등 음악이 필요한 곳에서는 언제든 노래할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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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라이더 이승민 씨. / 서정인 기자

"대학 졸업하고 평범한 직장생활을 시작했죠. 지금은 상호저축은행이라고 부르는 상호신용금고에서 첫 직장 생활을 했어요. 적성에는 잘 맞았습니다. 계속 쭉 일해 오다가 IMF 오고 김대중 대통령 정권 때 파산했죠. 파산 과제 업무까지 맡고 그만뒀습니다. 그때가 29~30세 정도였어요."

그 이후 방황이라면 방황을 했다. 사업도 해봤고, 직장생활도 다양하게 했다. 승민 씨는 뭘 해봤냐고 묻는 것보다 뭘 안 해봤냐고 묻는 게 빠를 것 같다며 웃었다.

"식당도 해보고, 술집도 해봤고, 건물 철거사업도 했었어요. 고철도 다루고, 보험회사에도 다니고, 지게차도 몰았고요. 전기를 다루는 계통의 일을 빼놓고는 다 해본 것 같아요."

어느덧 40대 초반, 승민 씨는 다시 시작해야 했다. 터전은 고향 통영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소자본으로 통영을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업종을 생각하니 '여행'이 떠올랐다. 여기에 무엇을 더해볼까 한참을 고민했다.

"처음에는 자전거를 2인·3인용으로 제작해볼까 하다가 인력거라는 걸 알게 됐어요."

인력거는 중국에서 수입해왔다. 첫 개시는 2014년 9월이었다. 인력거를 몰고 강구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하자 사람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지 3년 정도 됐는데 아직도 '뭐지, 저게?'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웃음) 인력거 여행이 통영에만 있는 건 아니고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도 있어요. 인력거가 전기 배터리로 에너지를 충당하는데 가스 배출 같은 것이 전혀 없는 친환경적인 교통수단이에요."

단순히 인력거를 체험하는 정도의 코스라면 여행객이 만족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통영 토박이로서 기억하는 통영의 옛 모습에 대해 들려주고 여기에 전문적인 해설을 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승민 씨와 다니면 통영 곳곳은 이야기 밭이다. 열심히 공부했다는 말만으로 설명 못 할 깊이가 느껴졌다.

"이 사업을 7개월 정도 준비했어요. 또 매년 통영문화원에서 지역 향토사 강의가 있는데 그걸 2년 동안 들었어요. 올해도 수업이 있다면 당연히 가서 공부할 거고요."

수입은 아직 크지 않는 듯했다. 특히 가장 비수기라는 겨울에는 손님이 확연히 준다. 온종일 밖을 다녀야 하는 일이기에 눈과 비도 달갑지 않다. 그럴 때 승민 씨는 손님들과 소통하며 에너지를 얻는다.

"기억에 남는 손님이 많습니다. 이걸 하면서 남은 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SNS' 통해서 소식을 주고받아요. 통영 오면 항상 연락을 주시기도 하고요. 임신을 해서 인력거를 타셨던 경기도 파주에 사시는 손님은 작년 11월 말에 다시 통영에 오셔서 찾아오셨더라고요 배 속에 있던 아기가 제법 커서요.(웃음) 전국을 바이크 타고 여행하는, 제주도 사시는 50대 부부가 계시는데 골목 안에서 같이 맥주 마시고 재밌게 시간 보냈거든요. 제주에 가셔서 저한테 귤도 보내주시고… 계속 서로 안부를 나누고 있고요. 한번 인연이 닿은 분들과는 계속 소통하고 있어요."

통영라이더 따라 입맛대로 하는 통영 여행

인력거가 승민 씨의 트레이드마크지만 승민 씨는 다양한 투어 코스로 여행객을 만나고 있다. 일단 성인 1~2명에 미취학 아동 1명이 함께 할 수 있는 인력거 여행은 통영 강구안 근처를 인력거를 타고 돌며 해설을 듣는 골목길 여행이다. 통영을 가볍게 둘러보는 정도의 맛보기 코스다. 뚜벅이 여행은 승민 씨와 함께 걸어 다니며 통영을 둘러보는 여행이다. 5인 이상이면 예약이 가능하다.

"뚜벅이 여행 단체로 한 게 최대 80명까지 해본 것 같아요. 힘들지 않게 가볍게 걸으며 통영을 여행하는 거죠."

다음은 섬 여행이다. 통영은 신안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섬을 많이 품은 곳이다. 승민 씨와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가 섬을 둘러보고 섬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했다. 거의 하루 종일 함께하는 섬 자유 여행이다. 승민 씨는 인터뷰 다음 날에도 우도에 섬 투어를 간다고 했다.

"남도는 3월 중순만 되면 동백이 피고 지고,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있는 섬에 같이 가서 가볍게 걷고 이야기 나누고 경치를 보는 그런 여행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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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착감성 여행을 위해 꾸민 이승민 씨의 차량. / 서정인 기자

그리고 올해 들어 '밀착감성 여행'이라는 것을 기획했다. 승민 씨의 차로 함께 이동하며 하는 여행이다.

"차량 투어를 하려고 이번에 래핑도 했어요. 차 없이 통영에 오신 분들이 온종일 제 차로 함께 이동하면서 통영을 알아가는 여행이에요. 1~3명이 타실 수 있어요. 신청하시면 픽업부터 해서 커피 제공, 노래도 들려드리고(웃음) 루지(썰매에 누워 아이스트랩을 활주하는 스포츠), 케이블카 중에 하나 선택해서 타보실 수 있게 하는 거죠. 코스가 짜여 있다기보다는 가보고 싶은 통영 곳곳을 다 보여드리는 여행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는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못 듣고, 못 보는 통영을 손님들이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 했다.

"제가 자란 곳이지만 종종 통영이 '이런 곳이었어?', '이런 이야기가 있었어?'라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가 들려주지 않으면 모르는 통영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서 들려드리는 여행을 추구해요."

승민 씨는 지금 일을 계속하면서 영역을 넓히려 하고 있다. 강구안 골목길 안에서 운영했던 카페 겸 갤러리는 얼마 전 접었다. 대신 다른 자리에 새로운 공간을 구상하고 있다. 아직 자리만 봐둔 상태지만 낡은 멋이 가득한 건물이 복합 문화공간으로 바뀔 모습을 즐겁게 그리는 중이다.

"미약하지만 저 하나라도 장소 하나를 살릴 수 있다면 좋겠어요. 전에 있던 골목에서 3년 동안 해왔으니까 더 방치된 구도심 쪽을 활성화시켜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목표가 일단 1층에 월세로 들어가서 점령을 하고…(웃음), 10평인 작은 공간인데 지붕과 대문만 바뀌고 일제강점기 때 집 그대로인 건물이에요. 들어가게 되면 인테리어 거의 안 하고 옛날 느낌을 그대로 살리려고요."

승민 씨는 통영 곳곳의 변화가 반갑지만은 않다. 옛것을 유지하는 것이 돈을 들여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늘 승민 씨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행정기관이 좀 더 세심하게 통영을 살피고 꼭 필요한 변화만 진행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인력거 여행은 충분히 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편안히 앉아 있으면 통영의 푸른 경치가 눈앞에, 쏙쏙 박히는 설명이 귀에 들린다. 이건 분명 '통영을 가장 편하게 여행하는 방법'이다. 봄이라면 더 좋겠다. 꼭 인력거에 몸을 싣고 남도의 봄바람을 흠뻑 맞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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