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 열반(究竟 涅槃) - 마지막 니르바나 : 마침내 니르바나의 세계에 다다르게 된다. 예수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한18:36)라고 한 바로 거기가 열반의 세상이다. 천국은 하늘 저편에도 있을 것이지만 온 천지에 두루 계시다고 우리는 믿을 수밖에 없기에 각자의 마음속에서도 천국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삼세 제불(三世 諸佛) - 세 계 모든 부처 : 삼세를 흔히 전생, 현세, 미래라고 한다. 부처는 깨달음이다. 사람이 깨달음을 찾을 뿐이지 깨달음의 세계는 시방삼세(十方三世), 즉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늘 존재하는 항상(恒常)하는 것이어서 니르바나의 세계는 늘 있는 하늘님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말을 가진 게 제일 이상하다… 말씀만이 남는다"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縟多羅三邈三菩提) - 반야바라밀다로 말미암아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으므로 :

아뇩다라샴막삼보리는 위 없는 바른 깨달음(無上正等正覺)이란 뜻으로 삼세의 부처님은 깨달음의 세계인 열반을 체득한 것을 말한다.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둥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故知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 반야바라밀다가 이 크게 신통한 욈, 이 크게 밝은 욈, 이 위 없는 욈, 이 댐 없는 댐 욈으로 온갖 씀을 저칠 수 있음이 참이고 거짓 아님을 앎으로:

댐이란 '견줄 수 있는 데'라는 뜻으로 견줄 데가 없다는 뜻이다.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은 온통 밝고 신명하고 견줄 바가 없어 진실하고 헛된 것이 아닌 줄 안다는 것이다. <다석어록>을 보자.

"우리가 말을 가진 게 제일 이상하다. 성경에는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지었다고 하고 말씀만이 남는다고 하였다."

천지지간에 사람이 없으면 어찌 천지를 조명할 것이며, 또한 그 정신과 신명을 말로써 하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 말을 씀이, 말씀이 없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리하여 반야바라밀다를 통해 우리는 온갖 고(苦)를 옆으로 저칠 수 있으니 연약한 인간이여 주문을 외우는구나!

고설반야바라밀다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故說般若波羅蜜多 卽說呪曰 揭帝揭帝 波羅揭帝 波羅僧揭帝 菩提娑婆訶) - 반야바라밀다 욈을 말하노니 곧 욈을 말하면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디사바하 :

주문이라고도 하고 진언(眞言)이라고도 한다. 기도하는 것이 우리말로 욈이며 불교경전에는 게송(偈頌)과 진언이 군데군데 삽입되어 있다.

'수리수리마하수리 수수리사바하'는 말로써 지은 업보를 깨끗이 씻기 위해 외는 주문인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이다. <서유기>의 손오공이 잘 외는 주문이다.

기도는 실상 끝 모를 곳을 향해 손을 비비는 행위다. 물론 맘속으로 발원(發願)을 하면서 하게 된다. 사람이 다급하면 어디다 의지하게 되는가? "하느님 아버지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지 않는가? 부처님의 세계에는 주술(呪術)이란 게 없다. 후세에 대승경전을 서술한 사람들이 추가한 것이라고 본다. 반야바라밀다로 아뇩다라삼막삼보리에 들어가면 기도와 주문조차 필요치 않겠지만 인간세계의 모두가 그 같은 경지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주술의 염력(念力)을 찾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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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큐슈에 있는 다석사상연구회 모임.

끝없이 일어나는 몸과 맘의 때를 닦아내기 위한 것

글쓴이가 애초 <반야심경>을 강독하기로 한 것은 계획된 뜻이 아니고 문득 시작한 것이다. 우선 다석의 우리말 풀이를 같이 알아보고 싶었고, 또한 반야심경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해 이참에 한번 다시 해보자는 어설픈 일이었다.

모든 경전이 그러하듯이 경전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깊은 뜻을 체득하기로는 히말라야를 오르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경전을 계속 가까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먼 옛적 인간의 영적(靈的) 황금시대를 살았던 소크라테스가 그러했고 공자가 그러했고 예수가 그러했듯이 사람의 아들로서 정신적 부활을 이룬 그이들을 배우고 싶은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들 때문일 것이다. 또 근세에 간디가 '진리파지(眞理把持)'로 깨달음을 실천하고 톨스토이가 <부활>을 썼듯이, 그리고 배달겨레의 현손(玄孫)인 다석 유영모가 그러했듯이 살아있는 이상 끝없이 일어나는 몸과 맘의 때를 닦아 내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하늘아래 중생(衆生) 아닌 것이 없지만 유독 인간만이 어쭙잖은 지혜를 부여받아 천지간에 하염없는 흐름에 상반되는 탐진치(貪瞋癡)의 욕망을 지어내니, 그것으로 인해 사람과 천지에 괴롬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하기야 인간의 지혜가 없었다면 세상은 저 아프리카 사바나의 정적과 소동만이 반복되고 하염없는 법(무위법, 無爲法)과 하염있는 법(유위법, 有爲法)조차도 알 수 없으니 어설픈 지혜를 갈고 닦아 참다운 지혜의 빛을 볼 수 있다면, 그러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대지는 윤택하고 비옥해질 것이다.

영국시인 월리엄 블레이크의 글을 하나 보자.

"The fool shall not enter into Heaven let him be ever so holy." -William Blake

해석이 쉽지는 않지만 대략 이런 뜻인 것 같다. "어리석은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가 비록 청순할지라도."

절집에 매양 앉아서 있는 아이가 비록 마음은 깨끗할지라도 열반의 세계는 그 앞이 나타나지 않는다. 부처님의 유언인 스스로를 의지하여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부촉(付囑)이 곧 블레이크의 시가 의미하는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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