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으로 깨닫자 함은 때묻은 걸레질
때로는 내려놓고 주어진 것 즐겨보라

그대는 왜 수행하는가?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다. 그대는 왜 신앙하는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다. 그대는 왜 사는가? 행복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저마다 인생에 추구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속 시원하게 깨달음 혹은 천국을 성취했다거나 영원한 행복을 얻었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간혹 그랬다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과연 그들의 말처럼 깨달음을 얻었거나 천국을 경험했거나 행복을 성취했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수긍할 수 있을지는 별개 문제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석가가 이미 대도(大道)를 깨달았고 예수는 천국에 이르렀으며 많은 사람이 행복을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평생 토굴에서 정진하는 구도자나 기독(基督)을 맹렬하게 신앙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으며, 행복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많은 사람이 있지 않은가? 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가?

올곧은 수행자나 신앙인들이 벌떼처럼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허튼소리는 집어치우라고.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엄연한 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빈틈이 없고 또한 엄중하다.

우리는 깨달음을 구하고 또 천국에 이르고자 하며 진실로 행복을 추구한다.

'깨달음이란 이런 것이다, 천국이란 이런 것이다, 행복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떠올리고 상상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것들을 실체인 양 찾아 떠난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의 세계가 결단코 없다. 그런 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행복은 다가갈수록 여전히 멀다. 구할수록 멀고 찾을수록 아득하다.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

없고 없고 없다는 것 또한 없다. 아니고 아니고 아니다는 것 또한 아니다. 생각은 한 조각 구름 같은 것이다. 어디선가 생겨났다가 문득 어디론가 사라진다.

관념이란 잠깐 들른 손님과도 같아서 언젠가 문득 내 곁을 떠날 것이다. 깨달음이 잠깐의 환각일 수는 없지 않은가?

천국이 잠시 환영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행복이 마치 구름처럼 잠시 일었다 사라진다면 그것은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생각은 본래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이다. 생각은 망령(妄靈)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망령된 생각을 객진번뇌(客塵煩惱)라고 한다. 생각은 잠시 들른 손님 같은 존재다.

생각으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때 묻은 걸레로 방을 청소하는 것과 같다. 생각에 갇히면 생각의 노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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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잘 다듬어지고 체계화된 사상일지라도 그것에 갇히면 괴물이 된다. 하물며 욕심과 원망으로 얼룩진 생각들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랴.

요즘 작은 선방을 열고 생각을 내려놓고 관념을 쉬면서 작은 행복들을 경험한다. 때로는 비우고 때로는 쉬면서 천천히 내 앞에 주어진 것들을 즐기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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