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임을 하고 나니 주위 사람들이나 후배들의 말이 '여생을 어떻게 보낼 계획입니까?'라고 묻기에, 송충이가 솔잎 먹고 자랐듯이 현직에 있을 때 못한 '후배나 제자들을 위해서 일을 하고 싶다' 해서 필자는 퇴직교원단체인 경남교육삼락회에 몸을 담고 있다.

여생(餘生)을 우리말로 옮기면 자투리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100세 시대에서는 자투리 삶이 거의 생(生)의 절반가량 되는데, 너무나 길다고 여겨져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흔히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며 다른 동물들보다 우수한 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라고도 한다. 우리 인간의 뇌는 65세까지 절반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 절반은 정년 후의 시간을 새하얀 캔버스에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 생각을 하면서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가는 시간일 것이다.

많은 위인은 늦은 나이까지 열심히 삶을 누린 사람들이 많다. 뇌는 쓰면 쓸수록 발달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나이가 많아질수록 뇌의 활용은 필수적이라고 한다. 한때 젊은 사람들의 베스트셀러였던 <영혼과 사랑의 대화> 작가인 김형석 교수님은 지금 망백(望百)이 되어도 젊은 사람 못지않게 강의나 포럼을 주재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 박사는 89세까지 수술을 했고, 빅토르 위고는 60세에 그 유명한 레미제라블을 발표했으며, 괴테는 82세에 파우스트를 완성한 것을 보면 정년퇴임을 하고 나이가 좀 들었다고 해서 꽁무니를 빼고 나홀로족이 되어 '삼식이'가 되지 말고, 비록 이루지 못할 큰 꿈이라도 갖고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삼락회에도 80살 넘는 회원이 몇백 명이 된다. 지회별로 교육에 대해 걱정도 하고, 세상살이도 곱씹어 보고, 상호 간 건강에 관한 정보도 교환하는데, 그중에서도 만사가 교육이라고 교육에 대한 걱정은 아주 적극적이다. 이에 반해 현직에 있는 교육 관료들은 원로들의 교육 이야기는 들은 척 만 척하고 눈도 꼼짝 안 하는 세상이다. 말로만 교육원로, 어르신, 노인공경, 스승 찾아뵙기 등 온갖 달콤한 단어로 미화하고 현혹하고 있지만 알맹이 없는 소라 껍데기와 같다. 누구나 세월 가면 다 늙을 텐데….

창가에 서서 모처럼 흰 눈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어보니 지회의 회원 한 분이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에 가슴이 덜컹했다. 지난해에도 20여 명이 유명을 달리했는데, 새해 들어 벌써 두 분의 조전을 받았다. 연로한 회원들이 많다 보니 이런 전화를 받는 횟수가 늘어가고 있다. 회원들은 대부분 40년 가까이 교육계에 봉사하다가 그것도 모자라 코흘리개 어린이들의 등하교 지도, 교육 도우미활동, 인성교육 기부활동 등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하다가 돌아가신 무명의 애국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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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 현장연수회 때, 점심때 반주 한잔에 취기가 약간 오른 회원 한 분이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우리 교육자들이 산림 녹화한다고 잔디 씨앗·아카시아 씨앗 모으기, 쥐꼬리 및 고물 모으기 등 궂은 일에, 양복 한 벌 값의 박봉에, 온갖 어려움과 가난을 이겨내며 반평생을 봉사했건만, 퇴임할 때 별 쓸모없는 '노랑 쇠쪼가리' 훈장 주는 것보다 차라리 시내버스 무임승차권이 더 필요하다"며, 유명을 달리했을 땐 '그 흔한 국화꽃 한 송이, 조기·조전 하나 헌정 못하는 대한민국이 불쌍하다'고 열을 올리시던 그 회원님이 눈앞에 선하다. 이런 선배들이 있었기에 훌륭한 나라를 건설했고, 경제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이 되었지만, 이젠 한 분 한 분 나뭇잎처럼 떨어져 한 줌의 흙으로 되돌아가는 선배님한테 부끄러워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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