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스크랩북에서 발견한 기고
이재용 구속은 경제민주화 첫단추

지난 설에 처가에 갔다가 먼지를 수북이 뒤집어쓴 오래된 공책을 여러 권 발견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펼쳐보니 놀랍게도 신문 스크랩북이었다. 누렇게 변색한 노트에는 1960년 기사들이 가득했다. 마산에서 촉발된 3·15의거부터 전국적으로 확산한 4·19혁명과 그 이후 소식들이 촘촘하게 정리돼 있었다. 장모님께 여쭤보니 아내의 큰아버지께서 젊을 때 만든 거라고 한다. 스크랩북 첫 페이지를 장면 총리 사진으로 장식한 걸로 봐서 정치적 지향은 민주당 쪽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을 보지 못하고 1년 전에 세상을 뜨셨다.

스크랩북을 뒤지다가 칼럼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1960년 6월 19일 경향신문에 실린 이 칼럼은 연세대 상과대학장 이정환 교수가 기고한 것으로 '제2공화국에 있어서의 경제민주화를 위한 제의'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경제민주화라고? 1960년에 이미 이 화두가 4·19혁명 과제로 제안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6월 15일 신헌법이 통과됨으로써 정치적 혁명은 확실히 성립됐지만 그 열매를 거두려면 경제적 혁명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첫 번째 과제는 정치적 예속으로부터 경제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경제가 왜곡되고 부패하게 된 근본 원인이 경제 원리가 아닌 정치 논리가 지배했기 때문이라는 인식으로 경제 행정을 중립화시키고, 관료의 부정과 불법부패를 철저히 엄단하며, 정치인의 선거비용을 기업가가 제공하는 관행을 금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두 번째 과제가 바로 '경제민주화'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경제민주화는 '국민의 절대 다수를 위한 경제 체제 내지 경제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정치의 민주화가 절대다수를 위한 정치를 가리키는 개념이기에 당연히 경제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장 내에서 독점화 경향은 지양되어야 하고 만인이 다 같이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기회가 균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놀라운 부분은 불균형 경제정책의 대명사인 박정희가 등장하기 전인 자유당 시절에도 이미 거대기업의 폐해가 심각했다는 지적이었다. 이 교수는 칼럼에서 "우리나라의 경제로 보아서는 지나칠 정도로 크다고 말할 수 있는 몇 개의 거대 독점 기업체가 출현하였다. 이러한 독점기업체가 독재정치가의 재정적인 뒷받침이 되어 왔다고 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미 1960년에 거대기업과 독재 정치를 한 세트로 움직이는 일종의 경제공동체로 파악했다. 독점 기업체는 재정적인 뒷받침 없이는 생겨날 수 없는데, 그 돈이 결국은 국민 세금이다. 국민 전체에서 나온 세금이 왜 일부 특권층의 이익에만 봉사해야 하는가? 정부가 계속하여 대기업에 특혜조치를 취한다면 정치와 경제의 야합에서 나오는 부정과 부패를 막을 도리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시간을 되돌려, 지난 17일 마침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됐다. 박근혜 대통령과 삼성그룹 사이의 뇌물공여 및 수수혐의가 적용됐다. 삼성그룹의 이씨 가문 지배구조를 지원하기 위해 증발한 국민연금 3000억 원도 물론 포함돼 있다. 이 교수가 57년 전에 지적했던 거대기업과 독재 정치의 야합은 21세기에도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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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번 구속으로 우리나라에서 경제민주화가 금방 이뤄질 거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 겨우 첫 단추를 끼웠을 뿐이다. 성장률을 높인다는 핑계로 특정 산업분야, 일부 지역, 특정 계층에게 특혜를 몰아주는 불균형 경제 정책을 폐기하고 모두를 위한 경제, 모든 분야와 지역이 고르게 성장하는 균형 경제로 나아가야 할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다. 하지만 우리는 돌고 돌아 이제 겨우 1960년 4·19혁명의 과제 앞에 다시 섰을 뿐이다. 혁명의 마음가짐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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