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 아주머니의 '염병'주인공은?
탄핵정국 그들 떠올리면 편견일까

누군가의 이름 속에 자리를 잡고 울어본 적이 있다. 현실 속에서든 삼류소설 속에서든 어떤 인연의 시작과 끝이 그렇고 연애의 시작 또한 대부분 그렇다. 내가 자리를 잡는 순간 그 누군가의 이름은 마치 밤하늘에 뜬 무슨 별자리 같다. 물병자리 혹은 전갈자리? 이때쯤부터 시작될 것이다. 나는 분열되고 나의 모든 것은 그의 이름으로부터 온다.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로 널리 알려진 '사뮈엘 베케트'의 문학을 설명하는 개념 중 자아의 무한한 분열이 있다. 이는 '나'라는 존재가 이름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또 정체성을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미분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분열은 인물 혹은 그 인물의 이름에 한정되거나 특정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막장드라마 속 인물들이라고 치부하기에도 낯부끄러운 이름들 속에 빈 화분처럼 쪼그리고 앉아있다. 건물 청소 아주머니가 참다못해 "염병하네"라고 소리칠 수밖에 없는 이름들의 주인공은 최순실일까? 아님 최서진?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혹은 당신이 지나가는 행인이나 조연으로 나오는 이 막장드라마 속 주인공은 최순실도 최서진도 아니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박근혜 정부의 주인공은 박근혜다. "자기만의 이름이 없으면, 구원도 없잖아"라는 사뮈엘 베케트의 문장처럼, 고유명사인 이름은 대개 한 존재를 다른 존재들과 구분 짓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주인공 박근혜는 더 이상 고유명사로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한다. 박근혜라 불리는 존재의 아버지와 그를 추종하거나 이용하거나 아무튼 공생관계에 있는 최순실 혹은 최서진이란 존재와 그 존재의 아버지까지 등장, 그 정체성을 변태시키는 악의 숙주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빈 화분 같은 나나 당신 혹은 "염병하네"라고 버럭 내지른 청소아주머니는 그나마 역할이라도 있다. 그런데 욕지거리에 가까운 대사 한마디는커녕 이름조차 없는 수많은 A 씨나 B 씨 등등은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어디쯤에서 울어야 할까?

그렇다. 문제는 A 씨다. 지난 14일 청주의 한 편의점에서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을 훔친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A(46) 씨 같은 사람들이 문제다. A 씨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 근처 편의점 앞을 지나다가 진열대 바닥에 떨어진 초콜릿을 발견, 집어들고 달아났다가 붙잡혔다. A 씨는 경찰에서 "밸런타인데이에 딸에게 선물로 주려고 훔쳤다"고 진술했다. 이쯤에서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물어야 한다. A 씨가 초콜릿이 아니라 박근혜나 최순실, 그리고 김기춘·우병우·김문수 등등과 같은 이름을 훔쳤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훔친 이름을 블랙리스트에라도 올렸으면 눈곱만큼이라도 스스로 위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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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정국이다. 박근혜라는 주인공을 떠받치는 등장인물들의 인간으로서 마지막 양심마저 점차 사라지면서 방귀깨나 뀐다는 이 나라의 모두가 염병을 하고 있다는 느낌은 지극히 개인적인 편견일까. A 씨가 훔친 초콜릿을 떠올리면 주인공 박근혜와 그 이름을 둘러싼 이름들의 '염병'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어처구니가 없다. 그 이름들은 대체로 애국을 가리키고 태극기를 더러운 속옷처럼 휘감아 최순실이 특검 소환 당시 '염병하네'라고 소리쳐 유명세해진 청소아주머니의 비난은 차라리 양반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리하여 국가와 결혼했다고 말하며 가슴이 미어진다는 주인공 박근혜를 통해, 그리고 그 이름을 위해 한 번 더 나라를 망치려는 이름들을 통해 국가마저 부끄러운 이름으로 떠올리게 한다. "염병하네"라는 말을 듣고 속 시원해 하는 사람이 많다. 왜일까? 막장드라마 속 등장인물들보다 못한 이름들에게 바치는 최고의 찬사이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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