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 주위에는 늘 아부꾼들이 에워싸 백성의 소리를 차단시키고 만다. 그래서 눈 멀고, 귀 먹어 민심을 헤아리지 못해 종당에는 낭패를 보는 사례를 역사적으로 수없이 보아왔다.

이번 글자리에는 임금에게 직간해 온 임계(林溪) 유호인(兪好仁 : 1445~1494)을 주제로 하였다. ‘막힘없는 언로만이 민의에 의해 정치를 하는 흐름’이라고 강조해 온 그의 면모를 살피고자 한다.

함양읍과 병곡면 경계에 도덕고개가 있다. 고개 옆에 도덕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바로 임계가 즐겨찾던 낚시터였다.

조선조 손꼽히는 대문장가요, 사림파의 거유로 성종의 총애를 받았던 그가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을 때다. 봄 날, 강물에 드리우고 있던 낚싯대가 급작스레 꺾일 듯이 휘어졌다. 잡고보니 두자도 더 됨직한 큰 잉어가 아닌가. 순간 “내 어이 사사로이 먹을쏘냐. 국사에 여념없는 상감께 진상해야지”라고 마음 먹었다.

망태기에다 잉어를 넣고, 곧장 한양으로 내달렸다. 보름이나 걸려 한양에 당도했다. 함양 백운산 기슭에서 자란 임계가 본 한양은 으리으리하다 못해 황홀지경이었다.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경소리에 놀라 주막을 찾느라 쩔쩔매었다.

그 때 마침 “밤이 깊었는데 왜 그리 헤매고 있소?” 풍골이 장대한 중년의 선비가 다가와 넌지시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예. 나는 함양에 사는 유호인이라 하오. 주막을 찾는 중이오. 그런데 댁은 뉘시오?” “나는 북촌에 사는 이교리라 하오.”

이렇게 인사를 나눈 뒤 임계가 잉어를 잡아가지고 온 사연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런데 이교리란 사람이 바로 성종대왕임을 임계가 알 리가 전혀 없었다. 청빈한 선비를 찾아내는 일을 낙으로 삼는 성종은 곧잘 민정시찰에 나섰다가 임계를 만난 것이다.

임금을 섬기려는 충성에 탄복한 성종은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이 밤에 주막을 찾는 것은 어렵겠소. 내 집에 하룻밤 유하는 것이 어떠하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동행하게 되었다.

어마어마한 궁궐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더욱이 침소는 너무 으리으리하여 나자빠질 뻔했다. 이교리가 권하는 술잔을 받아든 임계는 분기탱천하고 말았다. “여보! 이교리! 상감마마 덕택으로 벼슬을 했기로서니 이렇게 호사롭게 살 수 있소? 교리라는 미관말직의 생활이 이러한데 대신들은 어떻겠소? 위로는 상감마마를 기만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착취하는데 그 어찌 국태민안을 바란단 말이오!”

이렇게 맺어진 인연으로 하여 그 후, 왕과 임계는 군신의 의를 초월하여 친구의 정의로 지냈음은 물론이다. 오랜 기간 둘은 허심탄회하게 국사를 논하고 민심의 동향을 거리낌없이 알리는 한편 정곡을 찌르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임계가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내려갈 때 성종은 친히 손을 잡고 이별의 아쉬움을 전했다.

잊으렴 부디 같이 / 아니 가지 못할쏘냐? 무던히 네 싫더냐 누구 말을 들었느냐? / 그래도 애달프구나 / 가는 뜻을 일러라.

일찍이 유호인은 밀양출신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터득하여 거창현감?합천군수 등을 지내다가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기도 한 임계는 인생말년, 휴천면 송정리에 있는 용유담을 비롯해 함양일대 산재된 절경에 취해서 읊은 시가 유난히 많이 전해지고 있다.

오직 절대 군주인 임금에게 맹목적 충성을 강요하는 일방통행식 언로에서 탈피하여 성종과 임계와 같이 군신간의 위치에서 벗어난 의사소통은 특기할 사실이 아닌가. 대등한 입장에서 쌍방향식 언로를 확대시킨 일이야말로 설득적 커뮤니케이션을 발전시킨 쾌거임에 틀림없다.

<명신보감> ‘치정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도끼에 맞는 한이 있더라도 바로 간하고, 솥에 처넣어도 옳은 말을 다하면 이를 충신이라 한다’는 글귀를 되새겨볼 일이다.

언론의 금지규범에 익숙해진 왕조시대에 생명을 담보로 해야하는 직간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선인들은 곧은 말하는 용기를 날줄로 삼고, 귀에 거슬리는 말은 씨줄로 삼아온 것이 역사의 거울에 비쳐지고 있잖은가.

오늘날, 들끓는 여론을 굴절없이 통치자에게 전해줄 수 있는 충정어린 몇사람이 친구를 곁에 두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비단 나만의 기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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