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황산 꼭대기 자리잡은 진해탑
초행길 보듬는 길라잡이 역할 톡톡
일제강점기 아픔 간직한 망주석
해군·벽화·문화공간 흑백다방 등
곳곳 숨은 '풍경'여유·사색 안겨

바쁜 일상 속 산책할 여유도 없는 당신을 대신해 걷습니다. 동네, 골목, 철길, 둘레길, 해안선…. 걸을 수 있는 곳은 다 걸어보겠습니다. 경남 어디든 천천히 걷기 좋은 곳을 찾아갑니다.

자세히 둘러보고, 꼼꼼하게 소개하겠습니다. 만보기를 켜고 거리와 걸음 수도 기록하겠습니다. 잠깐 여유를 찾아 산책과 사색을 즐기려고 마음먹었다면 안내서로 사용해주세요.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창원시 진해구 장복터널을 빠져나오면서 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 <설국> 첫 문장을 떠올렸다.

눈의 고장이 아닐뿐더러 터널 때문도 아니다.

창원시 진해구 중원광장에서 바라본 제황산. 군함 마스트를 본뜬 진해탑은 초행길 손님에게 방향키 역할을 한다.

진해 옛 도심에 옅게 남은 일본 색채가 그 이유다. 건물이고, 길이고, 광장이고 새 단장으로 분주하긴 하나 진해가 지닌 멋은 쉽게 퇴색하지 않는다.

중원광장 근처에 차를 놓고 한 걸음을 옮긴다. 길 건너 지붕과 뼈대만 남은 건물이 보인다. 다른 곳이었다면 을씨년스러웠을지도. 이 또한 운치 있게 다가오는 까닭은 진해여서다.

평일 오후 진해 옛 도심은 다소곳하면서 잠잠한 맛이 있다. 벚꽃 피는 4월에는 상상도 못할 풍경이다. 느긋하게 걸으며 사색을 즐기려면 이때가 꽤 괜찮다. 날씨가 살짝 쌀쌀하면 그만큼 인적이 드무니까.

그냥 걷기 심심하다면 가까운 상점을 들러보자. 100년 역사가 있는 '진해콩'을 한 손에 들고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딱딱해서 이가 상할 듯하지만, 와작와작 씹히는 식감이 쌓인 피로를 날려보낸다.

제황산동 어느 골목길 풍경.

진해 옛 도심을 처음 방문했다고 겁먹지 말자. 보통 지역 표지물이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데, 이곳에서는 제황산 꼭대기 진해탑이 등대다. 그 모습도 군함 마스트(갑판 기둥)를 본떠 특색이 있다. 사정없이 하늘을 찌르는 고층 건물이 없어 어디서든 진해탑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제황산에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다. 모노레일카를 타거나, 걸어 올라가는 방법이다. 이날은 마침 월요일. 모노레일카 운행을 하지 않는 날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걷기로 작정한 날인데. 365계단을 따라 제황산 경사를 오른다. 차분하게 한 계단, 한 계단 오르길 추천한다. 계단 하나가 내 삶 1년 중 의미 있는 하루라는 마음으로.

계단 끝에 도착해 가쁜 숨을 고른다. 고개를 들자 진해탑이 기다리고 있다. 이전엔 1905년 일본이 러시아 발트함대를 격파하고 러일전쟁 승리를 기념하고자 세운 승전기념탑이 있었다. 광복 이후 일제 잔재 청산을 목적으로 헐고, 1967년 9월 20일 해군 군함을 상징하는 진해탑이 들어섰다. 마찬가지 월요일은 입장이 안 된다. 그러니 전망대, 창원시립진해박물관을 둘러보려면 월요일은 피하는 게 좋다.

마스트 앞에 서니 바다 방향으로 바람이 분다. 시선을 바다로 내리깔자 수평선으로 쑥하고 떠밀리는 기분이다. 바람 소리가 배 옆을 쳐대는 파도처럼 시원하다.

진해탑 주변을 자세히 보면 '망주석' 하나가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1910년(추정) 진해에서 일본군이 발굴해 일본 가고시마현 사이고 다카모리 무덤으로 이전한 비석이다. 난슈 신사에서 보관 중이던 것을 2009년 환수했다.

비석에는 한자로 '조선석 명치 43년 8월 29일'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국권을 빼앗은 날을 기념한 기념물로 사용한 흔적이라고 설명한다. 가슴에 돌을 얹은 듯 마음이 무겁다. 답답해진 마음을 발걸음을 옮기며 조용히 떨쳐 내본다.

볕이 잘 드는 제황산공원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숲길을 따라 진해남산초등학교 방향으로 하산한다. 군항 도시답게 곳곳에 해군과 관련한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 '원일다락방'이라는 이름이 적힌 건물이 있는데, 무엇을 하는 공간인지 궁금해진다. 주민에게 물어보니 해군 장병 쉼터란다. 1973년 발족한 옥포선교회가 시초다. 해군 장교 예배와 성경공부 등 신앙 공동체 생활을 하는 곳이다.

새 단장으로 분주한 중원광장 근처 지붕과 뼈대만 남은 한 건물. 이 또한 운치 있는 풍경이다.

제황산동을 걸을 때 앞만 보지 말자. 골목 틈새를 확인하는 버릇도 꽤 훌륭한 감상법이다. 진해희망의집, 원일다락방 근처 골목에는 벽화가 있다. 벽화 주변에 마을 주민이 앉아 있고, 저 멀리 진해탑이 보이는 풍경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인상을 준다.

제황산동에서 백구로를 가운데 두고 길 건너 중평동을 쳐다보면 '황해당인판사'라는 간판이 내걸린 건물이 있다. 빛바랜 간판과 비틀어진 창틀이 고목 나이테를 연상케 한다. 시간 여행을 온 듯한 이곳은 손도장 만드는 가게인데, 주인 고향이 황해도 해주라 '황해당'이다.

중원광장 테두리를 따라 산책 막바지에 이르면 '흑백다방'이 반긴다. 고 유택렬 화백이 1955년 칼멘다방을 인수해 흑백다방으로 이름을 바꾸고 2008년까지 운영했다. 지금은 유 화백의 딸 경아 씨가 연주회장, 문화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안을 들여다보니 유경아 씨가 지인과 연주 합을 맞추고 있다. 이날은 휴관이란다. 둘째·넷째 토요일에는 연주회를 여니까 살롱 공연 분위기를 느끼려면 주말에 방문하자. 이날 걸은 거리 2.2㎞. 8140보.

도천동 흑백다방. 중원광장 가까이 있다. 둘째, 넷째 토요일엔 연주회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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