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고 편한 쪽으로 움직이는 무의식
정부, 국민이 원한 사과 고민했어야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보자. 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도덕적인 사람이다. 나는 평범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이다. 사무실 구석에는 차와 커피가 있는 음료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칸막이로 가려져 있어, 안에 누가 있는지 밖에선 알 수 없다. 음료공간 벽면에는 차와 커피 가격을 적은 종이가 사람 눈높이에 붙어 있다. 이 종이 여백에는 조그만 장식용 사진이 인쇄돼 있다. 직원들은 종이에 적힌 가격을 보고, 자신이 마신 음료수 값만큼의 돈을 계산통 안에 자율적으로 넣는다. 내가 돈을 냈는지, 냈다면 얼마를 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과연 나는 마신 음료에 따라 자율적으로 돈을 냈을까?

영국 뉴캐슬대학교 멜리사 베이트슨 교수는 교수 휴게실에서 이런 실험을 수행했다. 베이트슨은 아무도 모르게 가격이 적힌 종이에 있는 조그만 사진을 매주 꽃과 사람의 두 눈 유형으로 바꿨다. 사람의 두 눈 사진을 붙였을 때 자율 계산통에 쌓인 돈이 꽃 사진을 붙였을 때보다 4배나 많았다.

이 실험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뇌에는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물건이나 상황에 집중하면, 우리의 모든 의식은 그 사물과 상황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하지만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되면, 우리는 늘 습관적으로 하던 방식으로 상황에 맞게 행동한다. 무의식적인 부분, 즉 무의식적인 뇌가 알아서 동작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인 뇌 덕분에 우리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많은 일을 쉽고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편리한 무의식적인 뇌가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순간에 동작해 내가 한 행동에 대해 나도 모를 때가 있다. 베이트슨의 실험에서도 그렇다. 사진이 있는지도 잘 몰랐고, 실제도 아닌 단지 사람 두 눈 사진 때문에 자율적으로 돈을 내는 것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떠한가? 나는 창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벤처기업에 투자하려고 한다. 벤처기업이라 그 기업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다. 하지만 나는 꼼꼼히 검토해 보고 그 기업에 투자를 결정했다. 나의 선택은 옳았을까?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애덤 알터와 대니얼 오펜하이머는 투자하려는 기업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을 경우, 기업 이름이 투자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했다. 연구 결과는 발음하기 쉬운 이름의 기업이 그렇지 않은 기업에 비해 상장 첫날 주가가 11.2%, 6개월 후 27%, 1년 후 33% 높았다는 것이다. 누가 단지 기업의 이름이 쉽다는 이유만으로 투자를 결정하겠는가? 이 경우에도 무의식적인 뇌가 동작한 것이다. 무의식적인 뇌는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쉽고 편한 쪽으로 내가 행동하도록 유도하고, 내가 의식적으로 행동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조차도 동작한다. 이러한 점들이 우리가 무의식적인 뇌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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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대한 사과성명을 냈다. 특검 수사에 적극 협조하고,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여 문화와 예술의 다양성을 확대하고, 문화행정의 제반제도와 운영절차를 과감히 개선하며, 문화예술계 자율성을 확립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고, 실행을 위한 논의 기구를 구성하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아마도 문화체육관광부는 이 사과성명을 발표하기에 앞서 깊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과성명의 문장에서 '문화'를 빼고 '과학' '기획재정' '외교' '법무'라는 단어로 바꾼다고 가정하면 모든 정부부처의 사과성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나 쉽고 편한 방식으로 사과성명을 작성했다고 느끼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무의식적인 뇌에 의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 구성원들 간의 무의식적인 동의를 통해서 단체나 조직에도 적용된다. 최소한 문화체육관광부는 국민이 원하는 사과가 어떠한 것인지를 의식적으로 고민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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