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유적 유물 여행] (3) 신화를 역사로 만든 유적
페르세우스가 세운 미케네 '건국·번영·쇠퇴' 그 흔적 좇아

우리는 지금 강력했던 고대 도시 미케네로 가고 있습니다.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쪽에 있는 유적으로 아테네에서 차로 2시간 정도 걸립니다. 가는 길에 만나는 코린토스 운하가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갈라놓았습니다. 그리스 앞바다 격인 에게해와 이탈리아를 마주 보는 이오니아해를 연결하고 있지요. 코린토스는 고대에도 두 바다를 연결하는 항구도시로 번영했던 곳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사도 바울이 이곳으로 전도 여행을 왔었죠. 고린도전·후서의 고린도가 바로 코린토스입니다. 어쨌거나 오늘 우리가 만날 미케네 유적은 두 바다 중 에게해와 관련이 있습니다.

에게 문명,그 찬란한 태동

◇지중해에서 피어난 꽃

지중해는 작지만 독특한 바다입니다.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3개 대륙을 끼고 있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에도 다양한 문화와 종교, 관습이 공존했습니다. 심지어 현재 지중해를 낀 나라가 태평양을 낀 나라보다 많지요.

고대에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바로 지중해와 연한 아시아 대륙 쪽에서 일어납니다. BC 3000년 전후해서입니다.

이들 문명은 BC 15~12세기에 전성기를 맞습니다. 문명은 발달하면 팽창하기 마련입니다.

이들은 지중해를 건너 유럽에 진출합니다. 육지보다는 바다가 안전하고 편하니까요. 이들이 지중해를 건너 당도한 곳은 가까운 에게해 주변이었습니다. 이 지역에도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언덕에서 바라본 미케네 유적. 멀리 코린토스와 그 앞바다가 보인다.

이 즈음 두 문명의 영향을 받아 드디어 에게해에도 문명이 일어납니다. 에게해 남쪽 크레타섬과 지금은 터키에 속한 트로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 미케네가 그 중심입니다. 서로 교류하며 비슷한 시기에 번영을 이룬 이들을 통틀어 '에게 문명'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전 세계를 지배하는 서구문명의 고향인 그리스 문명은 이들이 뿌린 씨앗에서 피어난 꽃입니다. 다양한 문화와 종교와 관습이 섞여 있던 지중해가 그 토양이 됩니다.

3000년을 버틴 난공불락 성벽 이제 폐허로

◇거인족이 쌓은 성

이제 미케네 유적지에 거의 도착했습니다. 주변은 낮은 구릉이 한없이 이어진 땅입니다. 고대 미케네에서는 도시로 오는 길목 등성이마다 정찰병을 뒀다고 합니다. 허가를 받지 못한 낯선 이들이 접근하면 불화살을 쏘고, 돌멩이를 던져 죽였답니다. 괜히 주변 언덕을 두리번거리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미케네 유적은 사방으로 두 개의 산과 두 개의 계곡으로 둘러싸인 삼각형 모양의 언덕에 있습니다. 어느 방향에서나 침략하기가 만만치 않은 지형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를 아크로폴리스라고 불렀는데, 쉽게 말해 성벽으로 둘러싼 왕과 귀족이 살던 공간입니다.

미케네 유적 입구. 사자의 문으로 관람객들이 드나든다.

평민들은 성 밖에 살며 농사를 짓다가, 위험이 닥치면 성 안으로 대피했다죠. 난공불락의 요새는 이제 폐허로 남았습니다.

유적지 입구로 가는 길옆, 거대한 돌로 쌓은 성벽이 아직도 튼튼하게 서 있습니다. 오랜 세월 몇 번의 심한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는데, 이음매가 여전히 딱 들어맞습니다. 3000년도 더 된 성벽이 말입니다. 후세 그리스인들은 이를 '키클롭스의 벽'이라고 불렀습니다. 키클롭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족입니다. 돌 하나가 15톤이 넘는다니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렇게 믿은 것이죠. 학자들은 당시 코끼리를 데려와 성을 쌓은 것이 아닌가 추정합니다.

미케네 유적 입구로 가는 길 옆 성벽.

국운을 가른 10년간의 치열한 싸움

◇트로이 전쟁

그리스 신화는 영웅 페르세우스가 미케네를 건설하고 왕이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제우스의 후손이자, 메두사의 머리를 자른 것으로 유명하죠. 어느 날 페르세우스가 이 지역을 걷다가 칼을 땅에 떨어뜨렸는데, 칼날이 땅에 박히고 남은 칼자루 모양이 버섯처럼 보였답니다. 그는 이것을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라는 신의 계시로 생각했다는군요. 

페르세우스가 떨어뜨린 것과 비슷한 버섯 모양 칼자루.

미케네는 그리스어로 버섯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영웅 페르세우스가 세운 미케네는 이후 그리스 본토 전역을 지배하는 강력한 나라가 됩니다. 미케네의 운명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트로이와 벌인 10년 전쟁 이후입니다. 당시 미케네의 아가멤논 왕과 영웅 아킬레우스가 그리스 본토 연합군을 이끌고 에게해 건너편 트로이를 공격합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아가멤논의 동생이자 당시 스파르타 지역의 왕이던 멜레나우스의 아내 헬레나(당시 최고의 미인이었다죠)를 꾀어서 트로이로 갔는데 이를 되찾으려는 전쟁이었지요. 집안일로 비롯돼, 상당히 거창해진 장기전이었습니다. 당시 트로이 역시 그쪽 지역에서 번영하던 강력한 국가였기에 정복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0년 차 되던 해 미케네 연합군은 목마를 이용해 트로이 성 내로 진입하고 전쟁을 승리로 끝냅니다. 그리스에서 가장 오랜 서사시이자 호메로스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일리아스>는 10년째 되던 해의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합니다.

1870·76년 학자 슐리만 '새로' 쓰다

◇역사가 된 신화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일리아스>의 트로이 전쟁은 그저 신화 속 이야기였습니다. 학자들은 진짜 있었던 일이냐 아니냐를 두고 토론만 벌였지요. 독일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이 트로이를 찾아내겠다는 꿈을 꾸기 전까지는 말이죠.

슐리만은 어릴 적부터 그리스 신화에 심취했습니다. 오랜 공부와 답사 끝에 1870년 그는 트로이 유적 발굴을 시작합니다. 신화가 역사가 되는 순간입니다.

19세기말 트로이와 미케네를 발굴한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왼쪽)의 흉상.

트로이 발굴에 성공해 명성을 얻은 슐리만은 야심 차게 미케네 발굴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결국, 1876년 미케네 유적도 발굴해 냅니다. 물론 그가 발굴한 것들이 꼭 <일리아스>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트로이와 미케네가 실재했었다는 것은 증명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미케네 유적의 정문에 다다랐습니다. 바위 문 위에 사자 두 마리가 마주 보고선 석상이 보입니다. 사자의 문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아치 위에 올려진 하나의 돌에 조각된 것인데, 이것만 해도 3m나 됩니다. 학자들은 이 사자의 문이 은으로 장식됐으리라 추정합니다. 거대하게 빛나는 사자상이라니, 당시 미케네를 방문한 이방인에게 이 정문 자체가 얼마나 압도적이었을까요.

다음 기사에서는 성벽 안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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