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보다 반 발짝 앞서가는 느낌
책은 스승…문학 통해 세상 배워

일 년에 적어도 십여 권의 책을 만들게 된다. 소속된 단체에서 정기적으로 만드는 문학지가 있고, 편집장을 맡고 있는 간행물도 있다. 게다가 근무하는 문학관에서 정기적으로 혹은 부정기적으로 다수의 책을 발간해낸다. 지난 연말까지 편집과 발간에 관여한 책자가 아홉 권 정도였다. 여러 차례 편집회의를 하고 원고를 모은 다음 그것을 하나하나 꼼꼼히 읽어나간다. 아직 세상에 나가기 전, 글쓴이 외에는 처음으로 마주하는 마음은 사뭇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과의 첫 데이트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설레고 긴장되면서 기대된다. 책 만드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한 출판계 원로에 대한 헌사는 "팔순의 나이에도 항상 새로운 세대의 소설을 읽고, 최신 영화와 드라마와 뮤지컬을 챙겨서 즐겼다. 작품에 감명을 받으면 새벽같이 나와 직원들 출근을 기다렸다가 재빠르게 의견을 묻곤 했다"고 적고 있다. 그는 직원들에게 반 발짝만 앞서가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런 느낌이다. 남들보다 아주 조금, 반 발짝 앞서가는 느낌. 조금 먼저 읽고 좋은 글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돋보이게 배치하고 싶고 독자들이 선택해서 읽을 수 있게 하고 싶어진다. 생각지도 못한 작품에 먼저 무릎을 치고 지은이와 얘기하고 싶은 마음에 안달하기도 한다.

근래 소설가 김춘복 선생의 원고를 읽었을 때 그랬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기를 배경으로 선생의 유소년기를 기록한 논픽션인데, 소설 형식을 띠었다. 워낙 관련 기록들이 많아 별다를 것 없을 거라는 선입견은 금방이라도 원고 밖으로 휘적휘적 걸어나올 것만 같은 개성 있는 인물들에 의해 깨지고 만다. 선생은 역사에 속한 채 박제된 개인이 아니라 역사를 바라보는 개인의 시선을 담아내고 있다. 소설가 이병주가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고 했거니와 이탈리아 작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가 "문학만이 개인의 삶을 기억한다"고 했던 것을 선생은 소설로 증명해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책 만드는 일이 항상 즐겁지만은 않다. 권력자가 세상을 떡 주무르듯 농단하거나 말거나, 그러다가 탄핵을 당하거나 말거나 음풍농월에 신선 장기 두는 소리나 해대면서 자연이 어떻고 풍경이 어떻고 하는 글만 읽는 일은 차라리 고통스럽다. 그런 책을 초교, 재교, 삼교까지 보노라면 눈알이 핑핑 돌고 글자가 제멋대로 막춤을 추어댄다.

그럼에도 책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 같아서 정직하게 투영한다. 문학지이기는 해도 작가들의 관심사가 장르에 상관없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책은, 혹은 문학은 세상을 보게 하고 그로써 삶을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동안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탓에 스승이 없다고 해왔던 것이 잘못된 것이다 싶다. 기실 나의 스승은 책(문학)이었고, 그것이 내 삶을 여기까지 끌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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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또 만들면서 많은 이들을 만나고 넓은 세상을 보았다. 물론 '반 발짝 앞서'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반 발짝, 아니 그보다 더 늦을 수도 있다. 어쩌면 굼벵이처럼 겨우 시늉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또 어떠랴. 가진 재주가 그 정도인데 앞서가기는 언감생심이고 뒤처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아니, 뒤처지면 또 어떠랴. 방향이 잘못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않은가.

문학평론가 구중서 선생의 원고에 "문화의 질은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역량"이라는 언급이 있다. 시인 김준태 선생은 "직선과 직선으로 부딪치지 말고 곡선의 철학으로 서로를 껴안아주는 역사"를 만들자고 주장한다. 나는 오늘도 문학을 통해 세상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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